
새벽이 찾아온다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아직 새벽이 찾아오지 않은 하늘 아래에서 사이러스는 생각했다. 이름조차 빼앗은 운명이라는 놈은 탐욕스럽게 내 인생을 집어삼켰다. 불멸자 가계 ‘엘리시온’이 필멸자를 지배하는 세상의 새로운 태양이 뜬다. 그 예언을 품은 사이러스(Cyrus)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운명 아래에 있었다. 엘리시온을 무너트리고 그 모든 필멸자 앞에 선 지금에서조차. 2미터에 가까운 키, 멀끔한 외형, 힘 있는 목소리와 유능함. 하늘을 끌어내리고 떠오른 태양은 담담하게 말했다.
“왕이 되지 않겠다.”
그 한마디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것이어서, 그를 이해하고 있는 몇몇 인간을 제하면 누구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키우다시피 한 앨런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을 터트렸고, 형제나 다름없는 로랑은 눈을 반짝였다. 그 옆에 있던 베르디는 앞으로의 파란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시온에서 벗어난 두 남매는 만족스레 그 광경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든, 자유로운 곳으로. 이 일로 거대한 손해를 본 티모시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폭탄을 터트린 사이러스는 단 그 말을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모든 뒷감당을 제 가족들에게 미룬채로. 앨런이 한숨을 쉬며 단상 위로 올라갔고, 로랑은 눈치 없이 손뼉을 치다 베르디에게 혼이 났다.
*
사이러스는 달려 나갔다. 아무런 약속도, 언질도 없었지만, 장소는 명백했다. 한때 새와 나비, 꿀벌이 바삐 날아다니던 꽃밭이던 곳. 화재로 인해 생명을 잃은 후에는 아담한 오두막이 세워졌던 곳. 너를 만났던 그곳. 모든 마법도, 그나마 정돈되었던 옷이 흐트러지고 머리카락과 옷 곳곳에 흙과 나뭇잎이 묻었지만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도착한 오두막 앞에 선 채로 숨을 고르고 옷을 털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에 있을 사람을 떠올리고 지었던 표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어디도 없었다. 기척조차, 누군가 있었다는 흔적도. 그녀가 없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몸은 돌려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그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왔네요, 럿.”
“프시케.”
언제나 단정하던 모습과 달리 흐트러져있는 프시케였다. 사이러스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털고 정리해주었다. 그녀는 피곤한 듯 그의 손길에 기대었다. 드디어 끝이었다. 그녀도, 그도. 운명이란 이름 아래 끔찍하게 엉킨 실이 풀렸다.
“피곤해요.”
“그렇게 보여. 들어갈까? 아니면…”
“들어가요. 지금은, 둘만 있고 싶어요.”
그는 순식간에 프시케를 안아 올렸다. 두 사람의 체구가 크게 차이 난 덕에 쉽게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오두막에 들어갔다.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고, 담요를 덮은 채로 따뜻한 우유에 꿀을 탔다. 두 사람이 함께 오두막에 모인 것은 몇 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이곳에 와서 물건을 두고 갔다. 어느 날은 안부를 묻는 편지를, 어느 날은 다량의 마른 장작을, 어느 날은 새로운 모포와 베개를…,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우유나 다과, 육포같이 먹을 것을 정리하고 채우고…. 서로가 없지만, 서로를 위하여 오두막을 관리했다. 당연히 두 사람이 돌아올 것이었으니까.
그들이 처음 만난 곳도 여기였다. 원래는 자연스레 생긴 꽃밭이었다. 그녀는 지금과 다른 백발의 소녀였다. 언제나 맨발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그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좋아했고, 그녀는 그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품에 안고, 맨발인 그녀를 안아 올리며 이곳저곳을 누볐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즐길 수 있는 작은 자유였다. 그런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이러스도 사이러스였지만, 프시케 또한 기구한 운명을 지닌 덕이었다. 프시케라는 이름, 그리고 반쪽짜리 불멸자. 프시케는 반신Demigod이란 호칭 아래 엘리시온이 되었다. 눈앞에서 그녀를 빼앗겼다,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재회하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반신인 그녀는 사이러스보다 성장이 배는 빨라서, 이미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 신비로운 힘을 사용할 수 있던 그녀는 여전히 어리던 사이러스를 구했다. 운명과 거대한 상단의 후계자라는 명목은 이래저래 노리는 녀석이 많은 탓이었다. 숲으로 도망쳐온 사이러스를 구한 것이 시작이었다. 사이러스는 매일같이 오두막이 된 꽃밭에 갔다. 한눈에 그녀가 프시케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의심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만으로 모든 것을 무너트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 녀석은 다시금 우리 사이에 등장했다.
“어린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던 거야, 프시케?”
사이러스 따위 상대도 되지 않는 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남자. 에로스는 오두막을 불태우고 프시케를 데려갔다. 누구를, 몇 명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뺨과 옷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이 피 칠갑이 되어있었다. 필시 잔혹하게 죽였겠지.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에로스와 프시케. 그 이름에 사이러스는 다시금 운명을 떠올렸다.
“정말로, 내 아내는 상냥하네.”
그는 사이러스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심리적인 압박도 육체적인 위협도 없었다. 그저 프시케를 데려갔을 뿐이다. 그것이 에로스가 남긴 최대의 상처였다. 에로스의 입장에서 필멸자의 세상에서 한 가닥 하는 상단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사랑이 신인 그에겐 그럴 권한도 없었다. 불멸자도 결국은 운명에 지배되고 있는 덕분이었다.
사이러스는 그날 이후 단 하나만을 떠올렸다. 신을 무너트리고 다시금 되찾겠다. 운명에 휘둘리던 그가 직접 고개를 숙이게 된 날이었다. 그는 사람을 모았다. 엘리시온을 무너트릴 사람들을. 그들에게 휘둘렸던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사이러스태양라는 이름 아래 그들을 모았다. 지금은 낮이 아니라 밤이라고, 저것은 해가 아닌 달이라고, 세상을 뒤집어 버릴 사람들을 모았다. 또 다른 태양아폴론과 달아르테미스의 협력을 받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그들은 단 하루 만에 세상을 뒤집기 위해 몇 년을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어제였다.
회상에 빠져있던 사이러스를 프시케가 가볍게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듯 고개를 드는 그에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뺨을 찔렀다.
“생각이 많네요.”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지금은 나만 봐요.”
그는 그녀를 강하게 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프시케 또한 조금 더 몸을 파고들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에로스를 찔렀어요.”
“…응?”
“너무 짜증 나서, 결국 찔렀어요.”
“다친 곳은 없어?”
“멀쩡해요. 숲을 그냥 달려 나오느라, 조금 더러워졌지만.”
본인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프시케도 괜히 다시 엘리시온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불멸자들이 무너진 지금 그 성에 남아있고 싶지도 않았고. 프시케를 데리고 도망치려는 에로스만 아니었어도 프시케는 진작에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에로스는 강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떠나자. 결국은 사랑의 도피구나.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우리 둘이라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한 치 앞이 기대되고 흥분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의 복부를 찔러버리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고 프시케는 회고했다. 사이러스는 고생 많았다는 듯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운명이 끝났네요.”
“전부 끝났지.”
오랜 기간 함께한 약혼자이자 친척을 찔렀지만, 프시케의 기분은 멀끔하기만 했다. 원래도 탐탁지 않은 존재였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시케가 에로스를 거부했다.” 이 뜻은 “에로스와 프시케는 부부이다.”라는 운명이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사이러스라는 새로운 태양이 뜨면서 프시케가 “프시케” 엘리시온이 아닌 단순한 프시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해서 무심코 사이러스의 품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추워?”
“추워요.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있어요.”
“네가 그리 말한다면.”
사이러스는 조금 몸을 움직여 그녀가 더 편하게 안을 수 있게 자세를 바꾸었다. 곧 아침이 될 터였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새로운 태양이 떴고, 사이러스는 이 세상의 왕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둘은 살아갈 것이다. 엘리시온을 버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갈 테지. 서로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