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rmenat name of the memory
“나, 매번 눈을 뜰 때마다 당신이 누군지 생각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등을 울린다. 남자는 유아의 돌아누운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좀 멍한 표정이겠지, 입을 살짝 벌리고 시선은 허공을 좇는 얼굴. 자기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쓰이지 않는 품사를 체화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천유아가 그에 대해 궁금증을 품게 만든다. 유아는 지난 한 달간 남자의 얼굴이 말하는 품사가 미래형인지, 과거형인지, 아니면 현재에 속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가 표현하는 모든 문장은 시제가 모호하다. 남자의 의식 속에서 여름은 겨울을 따르는 계절이고 죽음은 두 번 오는 것이며 출생은 한 번 있지 않았다. 그건 기억이라고 하기엔 색인이 없는 자료 뭉치에 불과했다.
“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해왔거든요.”
어쩌면 그저 빈 이면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시간 여행자라고 고백한 남자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기억해내지 못했으므로. 그는 불연속적인 시간의 한 판면에 끼어든 이물질처럼 사명만을 주입된 채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잊고 현재로 떨어졌다. 그러니 눈을 뜰 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그리워해 왔다고 고백하는 사람치고는 특이한 일이다. 아니면 자기 이름보다 중요한 존재를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유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허리에 두른 무거운 팔이 나른한 몸을 얽어맸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만을 기다려온 사람에 대한 향수는 시간을 넘나드는 표류자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천유아라는 인물에게 주어진 몫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녀는 그런 종류의 온기를 그리워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나한테 뭐가 중요해. 넌 어차피 떠날 사람이잖아. 날카로운 문장이 입 안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서재의 낡은 책장들 사이에서 솟아난 남자는 무언가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선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리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의 말은 협조 요청이라고 하기엔 수상할 정도로 로맨틱했다. 믿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간의 생은 근본적으로 투쟁이었기에, 오히려 그녀는 가벼운 말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듯 그녀에게도 가느다란 공백이 있었는데, 빈 공간은 무조건적인 환대와 사랑에 대한 틈이었다. 딱 그만큼의 결핍을 채운 감정은 때때로 밀물처럼 외로움을 몰고 다가와 기억의 경계를 흐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유령은 유아가 홀로 서재에 틀어박힐 때면 찾아와 근처를 맴돌다 사라졌다. 어렸던 밤엔 가끔 기억나지 않는 유령을 보물처럼 꺼내 보곤 했던 적도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말 없이 그녀가 좋아하는 차를 우려 건넨다거나 식사보다는 군것질을 챙기는 버릇을 걱정해주거나, 아니면 사소하게 별다른 용건 없이 ‘그냥’ 말을 걸어주는 사람.
천유아를 그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 유아는 차라리 그의 말이 그냥 해본 말이기를 상상했다가, 자신이 그러기를 바랐다는 사실에 놀라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발화되지 못한 문장이 묵직하게 들러붙었다.
여전히 두 사람은 한밤중 어두운 방 가운데 나란히 몸을 뉜 상태였다. 가까이 살을 붙이고 있었기에 상대방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듯한 기색에 그는 느리게 손바닥으로 끌어안은 몸을 토닥였다.
“그야 당연히 유아 얘기를 하고 있죠. 언제든 유아만큼 제게 상냥했던 사람은 또 없었거든요.”
“난 다정하지 않아.”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고, 해야 하니까 하는 거라고. 단정적인 말이 익숙한 듯 낮은 웃음이 돌아왔다. 이럴 때면 그는 유아가 제공하지 않은 모든 경험을 가진 어른 같았다. 그녀가 사실은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며 고독한 사람이고, 그만큼 자신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포함해 그녀가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약점까지 모두. 그가 제공한 모든 온기와 대가 바라지 않는 친절은 낯선 것이다.
늦은 퇴근 후의 식사 때나 비가 내려 혼자 돌아가야 했을 때, 긴 공방 끝에 지친 하루가 끝났을 때도, 그녀가 힘에 부칠 때면 그는 늘 거기에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또한 그는 젖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말려주는 사람이거나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고맙다는 인사에 돌아오는 환한 미소는 아직도 주머니에 넣어둔 반들반들한 조약돌처럼 가슴 속에 남아있다.
“알아요. 유아라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요.”
“…….”
옳지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의 친절에 어떤 부채감을 느낀다. 돌아누운 유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주 본 어둠 속에서 가느다랗게 입을 벌린 틈이 보였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독의 몫은 생득적이며 고질적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벼락처럼 내리치는 의문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만난 적이 없던가? 나는 내가 걸어온 길 뒤에 당신을 두고 오지 않은 것이 맞나? 그리고 유아는 흐린 먹처럼 풀어진 어떤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는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등 뒤의 남자 역시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부터 왔다. 연원을 알 수 없는 체온의 익숙함과 공백으로 존재하는 호칭까지 모두. 부재는 때로 존재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차라리 언제나처럼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이야기를 하면 좋았을 법 하다고 생각하며 유아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이 감정의 근원은 해명하기 어렵다. 그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말을 하는지. 당신이라면 오래된 틈의 어둠을 들추어볼 수 있는지, 어쩌면 그 틈을 내어둔 것이 당신은 아닌지. 그러나 그보다 난해한 일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다.
‘내게 당신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체념하기가 어려운지.’
낮게 울리는 웃음에 꽉 맞붙은 몸이 떨렸다. 바닷물처럼 차오르는 불안함에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축축해졌다.
“괜찮아요.”
무엇이? 유아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녀를 껴안고 있는 사람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는 평화로웠고 체온은 따뜻해 불안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 세상에서 그러지 못한 건 오직 자신뿐인 것만 같았다. 먹먹하게 밀려드는 고독감은 깊은 협곡에서 들이치는 바람처럼 차갑다.
지난 한 달간 유아는 그의 이름을 묻거나 알려 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녀는 자기 팔 안의 누군가가 그만한 무게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들은 호명만으로도 영원의 가치를 지닌다. 이 마음을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있음을, 약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 여행자는 떠나야 한다. 이름에서 비롯한 기억을 찾고, 찾아야 하는 물건을 얻고, 바꿔야 할 미래를 바꾸어 일상을 뒤로한 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 가장 깊은 곳의 틈을 틈으로 두어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러나 30일의 일상은 빛바래지 않을 것이다. 회상은 풍요롭고 추억은 불멸하리라. 그것으로 족했다.
*
갯벌에 물이 차고 빠지고 바람이 불고 별이 떠오르는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사건이 그러하듯 시간 역시 무한하지 않다. 일상을 남겨두고 그는 떠나려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한 번 있지 않다는 그의 말은 오히려 사실일지도 몰랐다.
유아는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진다. 익숙한 이목구비를 손끝으로 가늠하고 있노라면,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기억의 저편에서 익숙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실체를 가진 그리움이 거기에 있다.
지금은 곁에 없는 어떤 이름이 떠오른다. 상실의 예감은 늘 정확했던 만큼 잊을 수 없게 날카로웠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인사도 없이 가려고?”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을 떨치기 위해 유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걸친 숄을 어깨 위로 끌어올리며 떠나갈 사람에게 말했다. 가져온 짐을 군장 여미듯 챙기던 사람은 곧 자신 없는 얼굴로 일어섰다. 의수로 자기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떨구는 사람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어린애처럼 보였다.
“시간이 됐어요. 하지만 얼굴 보면 떠나고 싶어지지 않을까 봐.”
“그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널 억지로라도 보낼 거라는 것도 알았겠네.”
쭈뼛거리며 다가온 남자는 순간 미안해하는 얼굴이 된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것은 유아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면 미안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속으로 중얼거린 유아는 뒷짐을 지고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기억과 마음에 새겨진 깊은 틈은 자신이 갚아야 할 몫이지 이 사람이… 메울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천유아는 그에게 어른으로 남고 싶었다.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감당할 채무를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을 준 상대는 잃어버리기 전에 놓아주어야만 했다.
“나, 당신이 늘 궁금했어요. 사실 사명 같은 건 핑계였을지도 몰라요.”
가벼운 침묵의 끝에 조심스러운 고해가 이어졌다. 자기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어렵게 말을 풀어냈다. 회상 속의 그는 언제나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불분명한 기억 속에서 그녀는 소녀였고, 때로는 성숙한 어른이며 동시에 노인이었다. 그들은 다른 표정으로 몇 번이나 나타났다. 시간의 미분 불가능한 지점마다 당신이 있었다고 속삭이는 소리는 흡사 열렬한 고백처럼 들렸다. 그래서 당신을 늘 보고 싶어 했다고.
“왜?”
“당신이라면 내 이름을 불러줄 것 같아서.”
단지 그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 사랑 앞에서 자발적인 노역을 진 사람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억은 사소할지언정 언제나 단순 현재 시제로 존재하며 결코 지난 세대의 것으로 빛바래지 않는다. 문득 유아는 불멸할 지난 한 달을 떠올리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한 호명으로 항상성을 획득할 기억은 우리에게 있어 재난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재난이라면 인생을 두 번 산대도 기꺼이 다시 맞이하리라. 두 번 있지 않을 순간이기에.
“불공평해.”
가까이 다가선 사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달라 요청한다. 정오는 관계없으니 당신이 이르는 대로 나는 호명되어 오롯이 네게 속할 것이라고.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이 말한 대로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리면 어떻게 되지?"
"음, 괜찮아요. 아니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려나……."
자신 없는 대답에 유아는 웃고 만다. 콴은 열렬한 눈으로 그녀를 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눈을 볼 때면 사태는 사소한 일로 변한다. 침잠했던 기억은 온전히 수면 위로 올라오고, 텅 비어버린 틈에서 술렁이는 기포가 올라온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틈을 메울 쐐기로, 재난의 이름이 명명된다.
"난 이미 내 운명의 주인이야,"
그리고 레온 콴런, 너는 거기에 탑승한 선원이고. 단정적인 선언에 콴은 환하게 마주 웃는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다. 눈부시게 웃은 사람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속삭인다.
“그럼, 유아, 눈을 감아요.”
뒤이어 마디가 굵은 손이 눈꺼풀 위로 내린다. 감기는 손을 따라 눈을 감은 유아는 나지막한 말을 듣는다. 이제부터 당신은 누구도 모르는 미래로 나아가겠죠, 여태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이 되겠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넣어두면 되는 거예요…….
작은 항변과 함께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는다. 감은 눈 뒤로 밝은 빛이 비친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게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침묵이 계절처럼 벗겨져 나간다.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엔 누구도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거기엔 떨어진 책도, 일상을 부수며 등장한 남자도, 그가 무너뜨리고 간 고독도 없고, 오직 고요와 햇볕이 내리쬐는 곳 사이에서 나풀거리는 먼지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남은 것: 나지막한 온기, 혹은 어깨가 주름진 셔츠나 희미하게 감도는 체취. 이것이야말로 기억할만한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순간에서 그녀는 재회의 기약을 감지한다. 항구적이고 영구하여질 기억의 이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