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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留星

   "세자, 환은 들으라."
   
   어둑한 편전에 왕의 소리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 소리에 따라 세자의 고개 역시 그 무게에 순응하듯 아래로 향한다. 현왕이 자신의 궁이 아닌 편전에 세자를 부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 소리의 위압감으로 세자의 어깨를 짓누르기 위해서.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그 옥좌에 앉아 그에게 하명하기 위해. 거두절미하고 현왕은 환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 네 자리는 옥좌가 아니어야 함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 옥좌에 앉아 거역할 수 없는 왕명을 내려 그에게 몇 번이고 낙인찍을 생각이었다. 여기는 네가 탐할 자리가 아니라고. 
   
   이 현성국에는 두 왕세자와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여느 장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무공 실력과 어진 성품을 지닌 호, 영특하고 영민해 어려서부터 책사들의 수를 꿰뚫어보던 환, 그리고 두 왕세자들의 그늘에서 자신의 재능을 모두 숨긴 채, 숨죽이고 살아가는 공주. 성군을 바란 왕은 호가 왕위를 잇기 바랐으나, 호는 왕위에 욕심이 없었고 공주에게 왕위를 물리려니 왕좌를 향한 욕심이 그득한 환에게 꺾여버릴 것이 자명했다. 
   
   "대이국의 사절……"
   "사절단으로 절 보내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환이 고개를 들었다. 서슬 퍼런 푸른 눈빛은 자신과 똑닮은 푸른 눈으로 향한다. 동시에 왕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잘게 떨렸다. 하명 받지 않은 자가 왕의 눈을 바로 마주하는 것. 왕의 말을 끊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은 이 나라에서 불경죄를 물어 극형에 처해지는 행위들. 그것들을 알고 있을 왕세자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부러 그 행위들을 보이고 있다. 참아야 한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되뇌인다. 
   
   이는 환의 도발이다. 궁내의 많은 귀족들은 이미 환의 형인 호가 아닌 환을 차기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뒤에 섰다. 이는 현왕도, 호도, 환도 아는 사실. 그렇기에 왕은 더욱 그를 누르려고 한다. 대이국은 현성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님은 인근 국가의 국민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언제나 두 나라 사이에 사절단이 오고 갈 때면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대에 있었던 전쟁의 흔적은 그 후대로까지 이어져 서로의 존재를 경계했다. 그런 나라에 사절단으로 보낸다는 의미를 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입을 잘 놀려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을 때는 무탈한 것이고, 자칫 잘못했다간 대이국은 현성국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이다. 두 나라의 관계를 보아 결과는 뻔하지 않나. 
   
     "아바마마."
   
   고요한 편전에 세자의 발소리만이 선명하다. 옥좌에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선 환의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머금는다.
   
   "신탁이 내려왔다는 것을 들으셨사옵니까."
   “세자는 행실을 바르게 하라!" 
   
   "떨어지는 꽃잎은 별이라, 별을 품은 자는……."
   
   편전을 울리는 현왕의 목소리와 달리 환의 목소리는 뱀이 화살을 피해 가듯 부드러이 편전을 가로지른다.
   
   
"왕이 될 것이다."

*

   "사화님, 침전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사화는 그 나인의 소리를 듣고도 쉬이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하늘을 닮은 듯한 새카만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보석과도 같은 두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달이었다. 달이 차오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붉게 보인 탓이다.
   
   "네게는 저 달이 어떻게 보이느냐."
   
   사화의 물음에 나인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별 한 점 떠오르지 않은 하늘에는 보름이라기엔 조금 덜 찬 달만이 외로이 떠있었다. 응?하고 되묻는 사화의 시선이 나인에게로 향한다. 되물음에도 나인은 그저 그것이…하고 말끝을 흐릴 뿐, 쉬이 대답을 내려놓지 못했다. 나인은 사화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 중 한 쪽은 불길할 정도로 붉었으며, 그렇지 않은 쪽은 색을 잃은 것처럼 새하얬다. 새하얀 눈의 동자는 밤하늘에 잠식된 것처럼 검디검었으니 가히 인간의 것이 아니다. 나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화는 이 궁에 머물면서 단 한 번도 사람을 해한 적이 없으나, 그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내가 괜한 것을 물었구나."
   
   체념이 담긴 소리였다. 자신은 그저 그에게 보이는 달의 행색을 물었을 뿐인데 그들은 제 목숨이 달린 중대한 질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이래서야 저 달이 보여주는 증상이 자신에게 내려온 예언인지, 그저 피로감에 쌓인 환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들자꾸나."
   
   사화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연못 위의 다리를 걷는 사화의 옷자락 아래로 꼬리가 쓸렸다. 나인은 그 꼬리를 보면서 다시금 제 시선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 사화가 서있던 연못에 비친 달은 사화가 본 것과 달리 새하얬다. 
   
   "저…사화님."
   "그래."
   
   사화는 등을 돌리고 앉아 긴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촘촘한 빗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림에 걸리는 곳은 없었다. 황명이 있었사옵니다. 머리를 빗어 내리던 사화의 손이 잠시 멈춘다. 그가 무엇이냐. 다시금 머리를 빗어내리는 손길이 움직인다. 나인들은 사화의 몸짓에 불안감이 어린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들의 소명이니 머리를 빗는 것을 비롯한 각종 시중을 들었어야 했으나 사화는 그를 거절했다. 자신의 몸단장을 돕겠다는 것들이 곧 죽을 사람들처럼 바들바들 떨어댔으니 그를 편하게 여길 리도 없었다. 나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영물의 심기를 거슬러 죽을지도 모르거나-본인이 죽일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실수라도 하여 왕에 의해 그 목이 달아나거나인데 누가 마음 편히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것이……당분간 사화님의 처소를 별이궁으로 옮긴다고 하십니다."
   
   사화의 시선이 움직였다. 궁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버려진 곳이나 다름없는 곳이 아닌가. 왕에게 있어 자신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는가. 아니면…사화의 머릿속에 생각이 스칠 때, 나인이 다시금 입을 연다.
   
   "사화님의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만 숨어 지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사화는 미소를 걸었다. 감히 인간이 내 안전을 도모해. 우스운 이야기였다. 이미 지금의 궁에 가둬둔 것으로 모자란 모양이었다. 사화는 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신이라 일컫는 존재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용의 존재. 어린 용을 발견했던 현왕은 자신이 오래오래 길이 남을 왕의 재목이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물을 마주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 어린 용을 그들의 터전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왕실에 숨겼으며 그 누구도 탐하지 못하게 했다. 사화가 묵고 있는 궁 역시 그러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이나 결국은 사화를 묶어두는 감옥과도 같은 곳. 무릉도원을 그려둔 듯하나 용의 구슬을 빼앗긴 사화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곳. 
   
   "그리하겠다 이르거라."
   
   우스운 이야기였으나, 사화는 그 장단에 맞추기로 한다. 자신의 구슬을 되찾을 때까지만, 그래서 현왕의 숨을 앗고 이 궁에서 벗어날 힘을 되찾을 때까지만이었다. 

*

   문살 사이로 발라진 창호지 너머는 마치 옅은 붉은 색의 액이라도 뿌린 것처럼 붉었다.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음에도 열리는 문에 사화의 시선이 움직인다. 나인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사화님."
   "무슨 일이냐."
   
   그 하얗게 질린 낯에도 사화는 천천히 그 나인의 행색을 훑었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것인지 버선에는 흙과 먼지가 자욱했으며, 새하얗던 뺨에는 검은 무언가가 묻었다. 사화는 나인에게 다가가 그 뺨에 묻은 것을 문질렀다. 그 행실에 질겁을 한 나인은 반보 뒤로 몸을 물렸으나, 이내 죄송하다며 다시금 고개를 숙인다. 나인의 목소리보다 사화는 제 손끝에 묻어 번진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재다. 
   
   "사단이 났나보구나."
   "그, 그것이 편전에 불이……."
   
   과연 그뿐일까. 사화는 그 소리를 삼켰다. 낡아빠진 별이궁의 창을 열었다. 편전을 집어삼키고 있는 화마는 밤하늘을 삼킬 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들려오는 것은 아비규환의 소리. 여기저기에서 칼과 창이 부딪히고, 비명소리가 낭자했다. 붉게 물들어버린 하늘에서 사화는 달을 찾았다. 그가 본 달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달도 붉을 것이다. 자신은 이 미래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네 목숨 하나는 살려줄 터이니 이대로 달아나거라."
   "예?"
   
   "달아나라 했다."
   
   나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도 자신의 목숨을 이야기하자 다시금 고개를 숙여보이곤 등을 보였다. 복도에서 제 치맛단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도망치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저 아이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지. 사화는 그대로 텅 비어버린 별이궁에 앉았다. 타오르는 밤하늘을 풍경 삼으니 꼭 수호신이 아닌 재앙이 된 것만 같았다. 
   
   "게 누구냐."
   
   아비규환의 궁궐 내에 유일하게 평화로운 공간, 별이궁. 이곳까지 걸음을 할 궁의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러니 사화는 감고 있던 눈을 떠올려 어둠 속에서 걸어들어오는 인영을 마주한다. 날붙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보폭을 보아 남정네였고, 그 걸음걸이는 방정맞지 않으니 궁의 사람이다. 안전을 도모하니 마니 하더니 제 목을 치러 온 자인가 하여 사화는 그 현실을 마주하기로 한다. 
   
   "그대, 사화는 들으라."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집어삼키는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붉은 하늘, 그 아래 피가 묻은 검을 든 세자 환이 서있었다. 붉은 하늘과 대조적인 푸른 시선이 사화에게 내려꽂힌다. 쥐고 있는 칼이며, 비단 옷, 뺨할 것 없이 혈흔이 낭자하나 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환은 웃고 있었다. 
   
   "새로운 왕의 시대가 도래할 터이니 그대, 새로운 왕국의 별이 될 준비를 하라."
   
   붉은 하늘에 떠오른 붉은 만월이 검은 구름에 가린다. 왕세자 환은 말한다. 피로 그 옥좌를 차지할 테니, 자신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라고. 사화는 가늠한다. 현왕과 왕세자, 어느 쪽이 왕의 그릇에 더 적합한가. 사화는 수호신따위가 아니다. 그저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생명체에 불과하지. 자신의 앞에서 잡으라는 듯 내밀어진 새하얀 손을 본다. 
   
   "그리하면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그대가 빼앗긴 것들을 되돌려주겠다."
   
   사화의 손이 환의 손을 잡는다. 
   

―별을 닮은 꽃을 취하니, 별을 품은 자는 왕이 되리라. 
   사화가 궁에 당도하던 시절, 대신녀의 신탁이 현실이 되니 피 묻은 옥좌에 앉은 새하얀 왕이 붉은 하늘에 별을 닮은 꽃을 띄운다. 새로운 왕조가 써내려져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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