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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ness Cruel Love

   “안녕.”
   
   피아노의 마지막 음이 인사와 함께 어우러진다. 여운을 내는 잔물결에 퍼지듯 일렁이는 목소리,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그것은 사람을 한 번에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단 한 음절에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니, 그 목소리 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사계의 초입을 알리는 봄, 그와 함께 사시사철 싱그러이 피는 꽃, 노을과 자정 사이의 묘한 하늘이나 플랑크톤이 점령한 사해, 혹자는 아주 흔하게 사랑에 빠진 색이라 말했다. 솜사탕처럼 곱슬하게 부풀린 머리가 귀여운 인상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찰나의 순간은 음악 속 환상처럼 빛나지만 흐려지지는 않는다. 대답 없이 가만 바라보니 속눈썹이 흔들리도록 눈을 끔뻑이며 재차 말한다.
   
   “피아노 잘 치더라.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연주가 좋아서 듣고 있었어. 이름이 뭐야?”
   
   보충 수업마저 끝나 아무도 남지 않은 고요한 복도에서 쭉 걷다 보면 반쯤 버려진 거나 다름없는 고요한 음악실이 하나 있다. 먼지 쌓여 조율도 흐트러지기 시작한 피아노를 매번 열심히 쓸고 닦는 이. 그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되어 해가 질 무렵이면 가끔 자리에 앉아 건반을 누르곤 했다. 딱히 남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지도 않고 본인도 그를 원한 바 없으므로 조용히 살아가던 나날, 잔잔한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존재의 등장.
   
   소년은 이름을 묻지 않아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유명세를 따질 것 없이 같은 귀족이라면 모두가 입학 가능하다는 아카데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 시초부터가 다른 황족이나 성품이 뛰어난 노력가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핏줄 더럽고 게으르기로 악명난 여학생 하나가 있었으니, 그 악명 이상으로 대단한 외모가 절로 기억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름마저도 신화 속 인물을 닮아 떠올리기도 쉬웠다.
   
   반면 저는 어떠한가? 낯선 발음과 함께 먼 나라의 혈통과 섞여 방계의 귀족으로서 간신히 자리 잡은 입장. 주목 받을 특징도 멸시받을 결점도 없어 어중간하게 입학 인원의 자리를 채우는 정도에 그쳤다.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나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이들과 같은 수준도 아니고, 딱히 보장된 미래도 없어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할 정도의 존재. 이런 재미 없는 인생보다는 하루가 다르게 스캔들이 나거나 아카데미의 월간지에 실릴 법한 삶이 더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답 안 해? 무시하기로 한 거야?”
   
   또 다른 삶의 이상향이거나, 혹은 반면교사이거나. 어쨌든 간에 신화 속 존재가 아닌 엄연한 사람이 말을 걸었으므로 소년은 제 이름을 밝혔다. 그 뒤 대화는 딱히 생각지 못했던 흐름으로 이어졌다. 자기 이름을 밝히며 친하게 지내자느니 좋은 노래였다느니, 적당히 관계를 진전시킬 말을 할 줄 알았더니만 남들에게 들키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게 아닌가. 귀찮아지기 싫으면, 이라는 전제가 붙는 걸 보아하니 어쩌면 충고에 가까운 말일 수도 있겠다. 상당히 막무가내로 대화를 주도하던 소녀는 낡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드디어 작별이로구나.
   
   “내일 또 와도 돼?”
   
   대답할 새도 없이 소녀는 웃으며 사라졌다. 항상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떠나다니. 어이없는 첫 만남에 소년은 그저 바람 빠지게 웃었다.  친구라 하기엔 모호하고 동급생이라는 단어는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의 관계. 악연이랄 것도 인연이랄 것도 없는 시간이 쌓여 답답한 생활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음을 깨닫는 건 미래의 일이었다.

*

   “이번이 세 번째 거절이군. 젠장, 대체 뭐가 문제란 거야?”
   
   가주의 손에 들린 편지가 보기 좋게 찢어졌다. 거절의 답변이 담긴 신전의 입장문은 한낱 종잇조각이 되어 사용인들의 손 아래 스러졌다. 가주의 얼굴에 만연하게 드러난 불쾌감은 저택 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모든 사건의 당사자도, 그에 연루된 공범들도 죄를 지은 것마냥 고개를 숙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주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해코지를 들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혼기가 찬 나이가 되면 반드시 사교계에 나와 결혼할 상대를 찾아야 하는 것이 귀족 세계의 의무. 한미한 가문이건, 얼굴이 못났건, 성격이 포악하건 간에 남녀 할 것 없이 적당한 배필을 찾지 못하면 덜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아무리 뛰어난 공적을 가졌더라도, 훌륭한 성품을 지녔더라도 곁을 지켜주는 배우자가 없으면 이미지가 깎이곤 하니 참으로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신으로 늙어 죽는 삶보다 곧 세상을 떠날 노인의 등에 기대며 미망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더 나은 일이라니? 여신 아르테미스가 분개하겠구나.
   
   신분도 한미하고, 성격은 모난 돌을 가져온 듯 날카로우며 그나마 봐줄 것이라곤 얼굴뿐인 레이디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는 누구일까? 암만 아름답다고 한들 귀족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문의 이름과 신분, 작위뿐인지라 다가오는 남자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뒷소문에 의하면 창부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으니 더더욱. 하룻밤 상대라면 모를까 평생을 함께할 부인이라면 응당 현숙하고 조신해야지. 어느 밤거리에서 굴렀을지 모를 여자의 베일을 벗겨 입을 맞추기에는 얼룩진 푸른 피의 냄새를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선정된 후보자들은 레이디와 같이 어딘가 덜떨어진 남자들. 너무 늙었거나, 연애 관계가 더럽거나, 가문에서 반쯤 내쳐졌거나. 각자에게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고 세 후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수도 있다. 좋아,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결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다 치자. 양 가문에서 결혼 서약을 받아냈으니 이제 남은 건 신전의 허락뿐인데,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신전에서 지금으로부터 세 번째 거절을 받았다는 것. 대주교와 신의 이름 아래 허락된 결혼이 아니라면 사교계는 물론이고 제국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문에서도 잠자코 신전의 허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후보자의 가문 측에 문제가 있으리라 판단, 새로운 후보자들을 찾아왔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기 일쑤니……. 문제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여성 측으로 돌아갈 수밖에. 올림포스 가문의 덜떨어진 레이디에게 놓여진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만은. 무슨 술수를 썼길래 신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 가주는 신경질적으로 구혼서를 던지며 반쪽짜리 방계 친족을 나무랐다.
   
   “네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결해라. 가문의 누가 되고 싶지 않다면!”
   
   세이레니아는 드레스 자락에 보기 좋게 안착한 구혼서를 구겼다. 역시나 보잘것없는 가문의 셋째 영식이다. 가문조차 이어받을 수 없는 자리이거니와 도박 빚이 꽤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빚을 갚아주는 대신 결혼 제안을 했던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제껏 결혼을 추진하려 했던 자들보다는 훨씬 젊다는 것. 아마 딸린 애도 없고 재혼도 아니니 지금으로선 가장 적합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도박을 하니까 술도 자주 마실 거고, 운 나쁘면 폭력도 행사하겠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자신은 상대가 주먹을 휘두르면 의자를 내던질 성정이니 잡혀 살지는 않을 테니까.
   
   대답 대신 구혼서를 들고 곧장 외출할 준비를 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신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인자한 대주교의 얼굴을 보러 가 항의라도 해야겠다. 항의라니, 원치도 않는 결혼을 강행하라고 협박하는 일 자체가 우습긴 하다만. 일개 영애의 얼굴을 보러 그 귀한 걸음을 해줄지도 의문이다. 적어도 추기경 정도는 만날 수 있겠지. 어찌 되었건 이는 가주의 명령이었으며 가문에서 제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니, 이 구차한 상황을 낱낱이 털어놓으면 동정심에 고개를 끄덕여 줄지도 모른다.

*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사실 설명이라고 말하기에도 변변찮은 이야기. 귀족들 사이에 사생아가 생기는 건 흔한 일이고, 그 사생아의 어미가 창부거나 평민이거나 하여간 하찮은 신분인 것도 흔한 일이다. 간혹 어느 하나에 재능이 있기에 귀족 가문에 필적 당하는 것도 드물진 않고. 아, 그렇게 사교계에 들어선 사생아가 기죽지 않고 꼿꼿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는 일은 흔치 않겠지. 그냥 딱, 그 정도의 이야기. 귀족 가에 들어서기 전에는 거리의 악사로 살았다는 말이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당사자가 함구했기 때문이다.
   
   사교계에서 견디는 귀족 영애의 삶이야 모두들 알지 않나.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혀에 칼을 숨긴 채 웃으며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손짓으로 차를 마시는 것. 얇디얇은 허리를 만들어 파트너의 팔에 몸을 맡긴 채 높은 구두 위에서 춤을 추는 일. 개중 예술에 뛰어난 레이디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는다. 그마저도 취미에 국한된 것. 아주 일부의 여자들은 레이디로서의 정숙한 삶을 거부하고 말을 타거나 왕실의 회의실 한구석을 차지했다는데, 그건 세이레니아의 역할이 되지 못했다.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으니까.
   
   얼굴과 별개로 봐줄 만한 건 노래 실력? 목소리가 좋다는 말은 듣지만 쉽사리 음색을 내지도 않으니 그저 저 좋을 때만 흥얼거리는 콧소리가 전부였다. 차라리 볼쇼이 극장의 프리마돈나로 데뷔시키는 게 더 사용 가치가 있겠다는 가주의 말에도 가만히 있었던 걸 보면 제법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다만 연기 실력은 최악이라 극을 올린 지 사흘 만에 쫓겨났을지도. 세이레니아 역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은 훌륭한 신붓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차라리 공작 저에 들어오는 대신 거리의 악사로 이름을 떨쳤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모르지, 뭐……. 길거리를 전전하다가 굶어 죽었을 수도 있고.’
   “아가씨,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상념을 깨는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마차에서 내렸다. 공작 저 못지않게 거대한 신전은 겉모습에서부터 성스러움이 흘러넘쳤다. 허나 반짝이는 빛은 신의 축복이 아닌 여기저기 박아 넣은 금 때문일 거고, 기분 좋은 향기가 넘쳐 나는 건 향초를 곳곳에 피워두었기 때문일 거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명색이 신을 모시는 곳인데 허름하고 냄새나면 그게 더 품위 없어 보이니까. 신성모독일 수도 있겠다만은, 한 명의 수녀로서 신에게 맹세하겠다는 선언 아래 이곳에서 살아도 괜찮았을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자매님. 신의 축복이 자매님의 머리 아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올림포스 가문의 세이레니아입니다. 결혼 서약과 관련해 대주교님을 뵙고자 하는데, 괜찮은지요?”
   “대주교님께서는 현재 금식 기도 중이신지라, 손님을 맞이하기 어려우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어떤 용건으로 오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도 될까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군. 대주교는 바쁜 사람이니 쉽게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사연은 전달해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니, 신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거리에서 홀대당하는 거지도 하나의 신도로서 극진히 모신다는 이곳,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복도는 매일 쓸고 닦는지 반짝거렸고 벽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걸려있었다. 그 옆에서 자애롭게 기도하는 우리의 신께서는 평안하신지요. 지나가던 신부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길래 세이레니아 역시 엉겁결에 손을 모았다.
   
   “일개 신부인 제가 들을 이야기는 아닐 테고, 우선 사제님을 모셔오겠습니다.”
   
   홀로 남은 응접실은 고요했다. 멍하니 앉아 시간을 축내고 있으니 여기까지 와서 무얼 하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아까 마주한 신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사제일진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딘가 익숙할까.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니 기다렸다는 듯 성호를 그으며 인사하는 자의 목소리가 담담히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자매님. 샤를이라고 합니다. 사제로서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샤를이라는 이름은 아마 세례명일 것이다. 어디서 본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의아해하는 세이레니아와는 달리 그 얼굴에 일말의 당혹감, 혹은 반가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 맞은편에 앉은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곧장 본론을 묻기에, 세이레니아는 품속에서 구혼서와 함께 그간 퇴짜를 맞았던 신전의 거절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개중 하나는 가주가 갈기갈기 찢어버렸기에 차마 가져올 수가 없었다.
   
   “꾸준히 신전의 결혼 허가를 받기 위해 허가서를 보냈는데, 후보가 누구이건 간에 번번이 거절을 당하고 있어서요. 혹 이와 관련된 별개의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찾아왔어요. 우리 가문 측에서 누락한 사안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혼서와 신전의 입장문을 건네받은 사제는 꼼꼼하게 서류들을 살폈다. 그 태도가 퍽 진지해 세이레니아는 정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혹시 인성도 결혼 평가 목록에 해당되던가?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결혼을 승낙 받던데. 신전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순결 때문이라면 억울하다. 뒷소문은 둘째 치고 방탕하게 놀아볼 남자도 만나본 적 없다. 제게 다가왔던 남자들 모두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제가 몇 분째 묵묵히 서류만 바라보고 있으니, 세이레니아가 먼저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문제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한 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매번 구혼자가 바뀔 때마다 가문의 사정을 파악해봐야 하니까요. 이 자료들은 사본을 만든 뒤 다시 가문으로 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신전에서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천천히 말고, 가능한 한 빨리요. 신전의 허가 때문에 벌써 결혼이 석 달째 밀렸어요. 이러다 저에게 구혼하는 사람도 없어지겠어요.”
   “안타까운 사정이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심이. 신전에서도 지정된 기한 안에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더 빨리는 어렵습니다. 자매님께 좋은 인연들이 닿는다면 얼마든지 배필이 되어주실 배우자 분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거야말로 알맹이 없는 사탕발림이다. 허나 죄 없는 사제에게 불만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세이레니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을 떠나 신전 밖으로 나서려는데, 그 뒤를 따라 사제가 배웅을 위해 걸어왔다. 마차에 올라타기 전, 세이레니아는 의문이 담긴 얼굴로 주교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맙소사. 내뱉고 보니 한낱 바람둥이나 내뱉을 저급한 말투였다. 본뜻을 알아차린 건지, 아닌지 사제는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꾸 없이 얼른 마차 문을 닫았다. 이 상황을 누군가 지켜봤다면 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제까지 유혹하려고 한 문란한 영애로 소문났을지도 모른다. 이전의 상황을 뛰어넘는 악담이 더해진다면 정말로 구혼자가 끊길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는 의심은 얼른 내려놓기로 했다. 영국의 날씨처럼 오락가락한 날들의 연속이다. 얼른 돌아가서 정어리 파이라도 입에 쑤셔 넣든가 해야지.

*

   “졸업하면 뭘 할 생각이야?”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까지 끝마쳐야 하는 과제가 막바지에 달했으므로 깃펜을 놀리는 데에 집중하기도 바빴다. 반면 성적이라는 건 일찍 내던진 탓에 교사들도 혀를 내두른 불량학생은 옆자리에 앉아 찢은 공책으로 종이를 접는 데에 열중했다. 여전히 종이라는 걸 만드는 데에는 많은 품이 들었지만 돈이 넘쳐나는 귀족들에게는 코 푸는 휴지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신경 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마지막 문단에 마침표를 찍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생각 안 해봤어.”
   “넌 머리가 좋으니까 책사 같은 걸 해도 되겠다. 황실의 한 축에 낄 수 있을지도 몰라.”
   “별로……. 명예 같은 건 관심 없어서.”
   
   진심을 말한 것이었는데, 소녀는 무엇이 즐거운지 웃었다. 차라리 거짓말하지 말라며 자신을 다그치면 모를까, 알기 힘든 반응에 괜히 심술이 났다. 깃펜을 한 구석에 내려놓고 뚫어져라 얼굴을 마주하니, 만만치 않게 심술궂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얄쌍하게 휘어진 눈동자마저 아름다워 뭇 사람을 홀렸을 인물. 그 미소도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나 지어짐을 깨닫고 무시하게 된 게 얼마 전이지만. 소년은 소녀에게 되묻기로 했다. 졸업하면 무얼 할 것이냐는 물음, 여타 귀족 영애들에게는 결혼이라는 당연한 길이 따라 나올 것이지만 소녀 만큼은 다른 답을 해줄 것 같아서.
   
   “너는 졸업하면 뭘 할 건데?”
   “글쎄. 가문에서 붙여준 별 볼 일 없는 놈들과 결혼이나 하겠지. 그 전에 연회에 몇 번이나 얼굴을 비출 수 있을지 모르겠네. 맨날 내가 무슨 사고를 칠까 전전긍긍하는 작자들이라.”
   “의외네. 순순히 결혼할 성격은 아니잖아.”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놈들의 수준에 어울릴 얼굴도 아니지. 독립할 정도의 돈만 있으면 과분한 성 따위 냅다 던지고 나가는 건데.”
   
   어쩌면 그 별 볼 일 없는 가문에 제가 해당할 수도 있겠으나, 소년은 말없이 웃었다. 올림포스 가문의 위상과 악명은 사교계의 불문율과도 같은 것이었으므로. 아카데미에서 두 사람이 종종 어울린다는 소문이 끄나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건물 밖을 나서면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을 가문이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겠지. 그렇다 해도 소녀가 아무런 반응 없이 꾸준히 자신을 만나러오는 건 의아한 일이긴 했다. 그 의문에 답을 표하듯 소녀는 하나의 제안을 건넸다.
   
   “만일 나중에도 계속 피아노를 연주할 생각이라면 말이야. 무대에 서 보는 건 어때? 함께…….”
   
   뒷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물음을 입에 품었던가, 기억조차 모호하다. 무엇을 깨닫고 헤맬 새도 없이 시야가 뒤틀리며 어지러워진다. 설렘보다 성큼 앞으로 다가온 두려움에 사무쳐 뒷걸음치는 자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선율은 멈추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뒤따라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뛰어다니며 도망치기를 택했다. 소란으로 가득 찬 곳의 중심보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가 편안하기 때문이다.

*

   “네가 말해봐라, 세이레니아.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신전과 결탁이라도 했느냐? 뒷돈이라도 넘겨준 게야?”
   
   상쾌한 아침을 깨부수는 한마디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부터 들을 말은 아니었다. 간만에 시지 않게 탄 커피가 잘 넘어가나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 가지가 잘 풀리면 다른 한 가지가 꼬이기 마련. 세이레니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뒷돈이 있었으면 진작에 저택에서 도망쳤지. 가주가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이번 일은 정말 억울했다.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의도적으로 결혼을 피한다 한들 일확천금이 제게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응당 받아들여야 할 운명을 어찌 거부하겠어요?”
   “어제 신전 측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
   “계속해서 결혼 허가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에 관해 물었고, 사제는 자세한 내용은 살펴본 뒤 추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어요.”
   “사제의 이름은?”
   “샤를…….”
   
   이름을 듣자마자 가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사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곧 신전에 사용인 하나가 찾아가 신이 보는 앞에서 악다구니를 펼칠 것이다. 차라리 그전에 어떻게든 허가 도장을 받아올 걸 그랬나. 세이레니아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었다. 이제 와 조치를 취한답시고 움직인다면 더 큰 의심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죽은 듯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나, 계획이란 아무 소용 없는 법. 조용히 지나가나 싶던 저녁 시간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누가 봐도 신전의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사제복과 손에 들린 성경책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 도중 하인 한 명이 나를 부른다기에 대문으로 나갔더니, 일찍이 사제를 맞이한 자들이 심문이라는 핑계로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게 보였다. 올림포스 가문의 더러운 성정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빛을 발하는 법인지, 아무 죄 없는 신의 대리인까지 욕보일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전부 비켜. 날 찾아오신 거라고 하니까.”
   
   그와 별개로 동족을 경멸하는 건 본인의 자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제 봐도 반갑지 않은 불청객들을 거칠게 밀어내고 손님의 얼굴을 마주하니,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 인상. 한바탕 해코지라도 당하고 온 것일까, 세이레니아는 그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응접실로 안내했다. 무슨 용건으로 온 건지는 몰라도 모두가 엿듣는 바깥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로 바쁘게 걸음 하셨나요, 사제님? 외간 여자가 사는 집 문을 언질도 없이 두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랍니다.”
   “……먼저 자매님께 전해드릴 사안이라고 생각해 찾아왔습니다. 결혼은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않습니까.”
   “허가인지, 불허인지가 중요한 거죠. 어차피 결혼은 서로의 승낙 하에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저도 몇 달을 기다린 참에 지친 터라, 빨리 본론을 전달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죄송합니다만,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 올림포스 가문 특유의 성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주변에 집히는 것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고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누군가의 속셈으로 계속해서 결혼을 거부당하고 있는 거라면 그 적이 내부자인지, 신전의 조력자인지도 파악해야 했다. 일개 영애의 ―핏줄도 반쪽짜리에 불과한― 혼삿길을 막아봤자 그 어디에 도움이 된다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하면서, 세이레니아는 내뱉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담아 물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된다는 건가요? 심지어 네 번씩이나.”
   “모든 결정은 신의 대답을 대주교님이 전해주시므로, 자세한 사정은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런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전의 서약을 연달아 세 번이나 받지 못했던 어느 귀족은 외국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었고, 결혼을 포기한 뒤 수녀로서의 길을 걸어간 레이디분도 계십니다.”
   “그래요. 그건 그분들의 운명이겠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새 삶을 꾸리고 싶고, 가족들 모두가 그러길 원하고 있죠. 신의 뜻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내 삶이 더 중요하다고요.”
   
   참 우습기도 하지. 이런 일로 젊은 사제의 앞에서 제 간절함을 호소하며 울상을 짓는 꼴이라니. 아마 네 번이나 결혼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사교계에 퍼지기라도 한다면, 올림포스 영애가 저주받았거나 감당하지 못할 죄를 짊어지고 있다며 그나마 있는 구혼 제의마저 뚝 끊길 게 분명했다. 신전의 허가서를 위조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사되어야 할 일. 테이블에 절로 손이 올라갔다. 레이스 장갑 속에 감추어진 두 손이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쥔 채였다.
   
   세이레니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황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낱낱이 고했다. 제 가문에서의 위치, 역할, 현재의 실정과 결혼을 필요로 하는 이유. 한낱 사제에게, 그것도 처음 보는 이에게 고해성사하다니. 심지어 남의 집안 사정까지 구구절절 들어주어야 하는 사제는 무슨 죄란 말인가. 그러잖아도 맑게 일렁이던 풀빛 눈동자가 흐려진 것도 같았다. 세이레니아가 흥분으로 들뜬 숨을 진정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 사제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왜 원치 않는 길로 나아가려 하십니까, 자매님.”
   “그것이 제가 살 수 있는 길이니까요.”
   “순응하는 것만이 반드시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제님과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 설득하시려 한들 우리는 남이고, 제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셨으니 절대 이해하지 못하시겠죠.”
   “그렇다면 친구로서 하는 걱정이라면 어때. 세이렌.”
   
   세이레니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감히 사제라는 자가 공작 영애를 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애칭을 부르는 그 목소리, 어린아이를 대하듯 어딘가 묘한 말투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당혹감도 아주 잠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배신감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열기가 돌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비소와 함께 힘없이 끄덕인 고개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자신을 높였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일찍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초연한 태도, 흔치 않은 피부 톤이나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 아무리 시간이 흘렀더라도 부대껴서 살아가던 시절의 추억까지는 지울 수 없는 법. 왜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낯설지 않았던 건지, 예민한 관찰력이나 본능적인 직감으로 미루어봤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데. 보통 신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상적인 행복을 논하면서 남에게 오지랖을 부린다는 건 알았지만, 어쩐지 그 정도가 심하다 했다.
   
   “신전으로 가버린 뒤 어디서 살아가고 있나 했는데,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 친구로서 하는 걱정이라고? 그게 남과 뭐가 달라. 내가 결혼을 포기한다고 해서 달리 살아나갈 방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응? 말해봐. 자하라.”
   
   샤를, 샤를이라니. 사실 웃기지도 않는다. 신분도 별로 보잘것없는 이들이 아카데미의 그늘에서 만나 둘만의 친구 관계를 이루었다는, 옛 성장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의미 없는 과거가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악단에나 들어가자고 농담을 던졌던 시절은 이제 없는데. 신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졸업 때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부랴부랴 아카데미를 떠나갔던 것이 수 년 전. 친구라는 관계도 모호한 시기가 지난 뒤, 그는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걸까?
   
   “내 결혼 문제에 네가 연루되어 있을 줄이야.”
   “……그냥 우연일 뿐이야. 조금이나마 친분이 있는 내가 사정을 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지.”
   “연락 한번 없다가 이제 와 등장해서는 하는 말이 결혼하지 말라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이해하지 못했을걸. 그러니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왕실에서 결혼을 막았어? 아니면 올림포스 가문 만큼 세력이 강한 가문? 신의 뜻이니 뭐니 하는 장난 같은 소리 그만하고.”
   “그건 불경한 말이야, 세이렌. 그저 악담이 버젓이 돌고 있는 상대들과 정략결혼을 시키려는 가문의 뜻이 눈에 훤히 보였으니, 조금이나마 그 시기를 늦춰보려고 한 거야.”
   “그렇게 몇 달을 미룬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고. 왜 그렇게 남의 혼삿길을 막아? 자기도 결혼 못하니까 나도 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반쯤 농담 투로 던지긴 했지만, 세이레니아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작은 농담 하나로 웃고 넘기기엔 상황이 커져 버렸으니까. 자하라도 아마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올림포스 가문의 최후 통첩을 받았으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단 사실에 저택을 찾아왔을 테고. 사실 결론은 간단했다. 어떻게든 신전의 허가를 받아내어 미루고 미뤄뒀던 결혼을 성사하는 것. 신전의 위상과 세이레니아 본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신전이 양보하는 게 맞다.
   
   그런데 왜, 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어떤 대답을 바라기에? 오히려 파혼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자신인 양,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돌린 자하라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히려 울고 싶은 건 이쪽인데도. 신의 뜻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방패 뒤에 숨어 자신의 길을 막아 세우는 걸까.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는 것인지. 세이레니아는 말 없이 자하라를 바라보았다가,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재차 물음을 던졌다.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 가문을 떠나기라도 바라는 거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는 편이 나아.”
   “네가 어떻게 날 도우려고? 난 변변찮은 패물이나 돈도 없고, 가문을 벗어나 도망치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쫓아올 텐데. 그 과정에서 네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도울 수 있는 한에선 어떻게든 해볼게. 신전의 힘을 빌려서라도.”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오랜만에 만나서 고작 하는 말이 그런 거라면, 그냥 못 들은 척할게. 날 생각해준 건 고마운데, 이만 돌아가.”
   “세이렌, 제발.”
   “아니면 내가 결혼하면 죽는다는 신탁이라도 받았니? 미혼의 영애와 사제가 눈이 맞았다는 추문이 나길 원하는 건 아니지? 그래, 어차피 쫓겨날 거라면 그런 것도 괜찮겠네. 네가 떠나기 싫다면 쫓겨나게 만들어줄게.”
   
   세이레니아는 소파에 걸터앉아 그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코르셋으로 촘촘히 조인 가슴에 팔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끌어 올리는 순간, 자하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흐트러진 치마 주름을 일방적으로 정리하더니, 소리 없는 목례만으로 인사를 건네고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싫다, 아니다라고 몇 번을 부정할 때는 간절하더니 짓궂은 장난을 한 번 쳤다고 도망칠 줄이야. 불청객을 쫓아내긴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더러웠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짜증 나…….”
   
   어차피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 무얼 기대하기라도 했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위기에서 구해줄 왕자님 따위를 바라본 적은 없었는데. 올림포스 가문은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며 선전포고를 내놓았고, 특별한 사안이 없는 한 일주일 내로 신전의 허가서는 수리될 것이다. 급조한 결혼식은 빠르면 한 달 내에 이루어지겠지. 아무리 신전의 힘이 크다고 한들 황실의 압박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자하라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될 테고, 딱히 신실한 신도도 아니었으니 한 명의 이름뿐인 귀부인으로 남아 생을 마감하겠지.
   
   그건 오직 나만이 감내할 일이 아니라, 귀족 영애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비록 그 처지가 남들보다 조금 안쓰러울 뿐. 모든 걸 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왜 인제 와서 현실을 직면하는 게 고통스러운 걸까……. 

*

   정해진 운명을 비틀고 잘라내도 결국 끈은 다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세이레니아는 곧 결혼식을 치르고 가문을 떠날 것이다. 아무리 현실에 순응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삼키는 고통이 다가오면 세이레니아는 반드시 불행해진다. 결혼을 하지 않는 미래보다 결혼을 할 수밖에 없는 미래가 더 어둡게 보인다면, 당연히 차악을 선택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신에게 대답은 없었으나 인간의 결정은 그러했다. 오랜 친구에게 불행을 허락하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감히, 불경하게도 신의 뜻을 거역했다. 대주교의 눈을 피해 거짓된 문서를 보내고 고쳤다. 이것으로 그들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버는 일이 최선이었다. 거짓을 고하는 건 사제의 의무가 아님에도, 이 작은 죄악을 통해 운명을 막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 하지만 그조차 다 헛된 짓이었구나. 주교로서의 세례를 받는 날, 대주교는 제 머리 위에 성수를 부으며 인자한 태도로 읊었다.
   

   ‘그간의 죄는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나, 앞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뜻을 내려놓거라. 신께서 정해주신 운명은 곧 숙명인지라 한 인간의 힘으론 돌릴 수 없단다.’
   
   그 모든 악행을 보지 못한 척 뒤에서 눈을 감은 채로, 당신은 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성수로 채 뒤덮지 못한 죄를 무엇으로 씻어야 진실로 정결해질 수 있을까요. 친애하는 당신의 뜻을 따라 젊은 주교로서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건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주교로서의 첫 역할로 그들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달라니, 스스로 지은 죄를 스스로 마무리하라는 당신의 뜻은 다정할 정도로 잔인하더군요.
   
   “……결혼 서약을 진행하겠습니다.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약서를 읽어주십시오.”
   
   애정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이는, 예비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손에 들린 종이를 들어 올렸다. 양피지에 검은 잉크로 쓰여진 글씨 역시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물며 그 문자를 읽는 이의 목소리는 어떠한가. 목석처럼 앉아있는 하객들도 거짓으로 점철된 행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곳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뭐가 있을지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살펴보기만 할 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아름다웠지만, 미소는 아름답지 못했다. 표정 없이 비어있는 얼굴을 채우는 붉은 톤의 분이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얼굴에 겨우 화색을 더해줄 뿐이다. 남자도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는 양 표정이 좋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 성사되는 약속인지, 예식장에 자리 잡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정해진 관례처럼 어느새 탁자 위에는 포도주가 담긴 한 쌍의 잔이 놓여있었다. 이제 서로의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면 그들은 피보다 짙은 관계로 얽힌 부부가 된다. 신의 이름 아래 맹세한 그들의 약속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포도주를…….”
   “컥!”
   
   엄중한 연설을 끊어내고 들린 건 남자의 단말마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을 냉큼 집어 들어 한 입에 그것을 다 털어 넣나 싶더니,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제 목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몇 번 기침을 하기에 사레인 줄 알고 모두 한심하게 보았다가, 남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하얗게 변하길 반복하니 상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했으나 남자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중독사였다. 누군가 포도주에 독을 탔다. 허나 독은 신부의 잔에서는 검출되지 않았는데, 아들을 잃은 가문과 황실은 이 독살 사건의 범인을 세이레니아라고 주장했다. 연달아 이어진 신전의 불허, 결혼을 꺼리는 듯한 태도, 올림포스 가문은 결백을 주장하며 세이레니아를 감싸는 대신 그를 외면하기를 택했다. 게다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세이레니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까지 존재하니, 사실상 사건은 종결된 셈이었다.
   
   살결을 장식한 하얀 쥬얼리들이 바닥에 흩날리고, 찢겨진 드레스 자락을 뒤로한 채 황실의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가문의 모든 이들이 보았다. 뱀의 눈으로 사라진 그림자를 헐뜯고 비난하는 그들의 목소리까지도 생생한 것을. 같은 귀족을 시해했더라도 반쪽짜리 올림포스의 핏줄은 두려웠던 모양인지, 그 이상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올림포스는 그들의 반쪽을 달가워하지 않으니 끝은 당연히 사형이겠지.
   
   사실 가문이 모를 리 없다. 이 모든 작당이 올림포스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누군가 암살을 기획했다는 것을. 세이레니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살해할 깜냥 따위 없었으며 그런 독을 구할 능력도 만무했다. 차라리 두 사람의 잔 모두에 독을 넣고 자신은 마시는 척하면서 용의자의 범주에서 벗어나려고 했겠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것보다, 어차피 가문에서 쫓아낼 이 하나를 범인으로 몰아넣는 편이 더 쉽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뭘 기대한 건지.”
   
   어차피 그들은 세이레니아를 사용 가치가 있는 물건으로도 보지 않았다. 언젠가 써먹기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인 것, 혹은 누군가의 대체품. 그 결말이 이런 시궁창이었다면 정말로, 그의 말대로 도망치기라도 해볼걸. 시도라도 해보았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용의자에 해당된다면 자하라도 잡혀가지 않았을까. 신의 대리인을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그 죄목은 무엇이 되지? 어차피 내가 죽는 마당에 남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어쩌면 이미 지친 걸지도 모르겠다. 결혼이니, 죽음이니 하는 모든 상황에 초연해지고 만다. 목전을 앞둔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져 숨만 내쉬기를 반복하면, 밤이 가고 또다시 아침이 찾아오겠지. ……죽음은 언제 문을 두드릴까. 사형대에 목을 내놓고 칼날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눈을 감았다. 얼마 되지 않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눈이 떠졌지만.
   
   “뭐야?”
   “세이렌.”
   
   그는 예상과 달리 상흔도, 묶인 자국도 보이지 않은 채 깨끗한 성복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 주례를 위해 둘렀던 금빛의 주교복 그대로였다. 어찌 홀로 황실의 감옥에 들어왔는지 묻고 싶었으나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든, 추궁하기 위해서든 목적이 있을 테니. '그러니 결혼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이제 와 자신을 책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미리 경고했던 거라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다른 사람들처럼 날 비웃으러 온 건 아닐 테고…… 마지막으로 기도라도 해주러 왔어?”
   “…….”
   “이제 남편을 죽였다는 악명까지 생겼으니까, 살아남아도 더 이상 나한테 구혼할 사람은 없겠다. 다행이지? 결국 신전의 뜻대로 됐잖아. 아니, 네 뜻인가? 내가 결혼하지 않길 바랐던 건?”
   “이런 일을 바란 적 없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고.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잖아. 손부터 풀어줄게.”
   
   주교라는 이름으로 어디서 감옥 열쇠라도 받아온 걸까, 두 손을 묶은 수갑을 풀어주겠다는 그의 말에 세이레니아는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구속을 풀고 감옥으로 나오면, 그러면 죄가 사라질까? 거짓으로 쓴 누명이라 하더라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으면 결국 죄인으로 살아갈 게 분명한데.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을 끝까지 도우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는 단순한 선의나 의무 따위로 포장될 일이 아니었다. 공범으로 연루되더라도 세이레니아의 탈옥을 돕겠다는 무언의 행동일 뿐.
   
   “이러지 말고 빨리 돌아가. 너까지 죄를 뒤집어쓸 거야.”
   “괜찮아.”
   “고집 피우지 말고 이성적으로 굴어. 이건 네 목숨만 달린 게 아니라 신전의 안위도 포함된 일이잖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너는 도망칠 준비만 하면 돼.”
   “왜? 사실 네가 죽였다고 거짓 자백이라도 하려고? 사람들은 믿지도 않을걸. 그리고 멋대로 행동하면, 내가 먼저 콱 죽어버릴 거야.”
   
   협박이라도 하면 조금 물러서나 했는데, 오히려 자하라는 희게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어 보일 법한 표정이 아니었기에 세이레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협박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걸 계획해 둔 사람처럼 구는 태도. 철창 너머로 엉망이 된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이 차가웠다. 오랫동안 바깥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거짓말. 죽는 게 제일 무섭다고 했었잖아.”
   “……억울한 누명으로 무관한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나아.”
   “내가 잔에 독을 탔다고 해도?”
   “거짓말은 네가 하고 있잖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그래. 나도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세이렌. 그러니 도망치라고 한 거야.”
   
   함께…….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단어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얼핏 입 모양을 본 것도 같았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맞닿은 두 눈이 흐려졌다. 감옥의 습기 탓에 속눈썹이 무겁게 젖어 든 탓이다. 용기 따위 없는 겁쟁이들이었기에 갈라지고, 멀어지고, 끝내는 이렇게 다시 만나도 같은 자리에 서질 못한다. 운명론이니 뭐니 하는 것을 믿지도 않으면서 누군가는 신을 향해 기도하고, 누군가는 악착같이 인간으로서 살아남기를 바랐다. 끝내 모든 자들이 그렇듯 정해진 결말에 굴복하게 되었지만.
   
   “한 가지만 묻자, 자하라. 날 사랑해?”
   “……이제 와 그런 물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아니. 회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날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담한 일을 벌이진 않을 테니까. 끝내 고백도 못 해보고 겁쟁이로 남길 바란다면 계속 입 다물고 있어.”
   
   세이레니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마주한 자하라의 두 눈이 떨리다가 이내 아래로 추락했다. 치명적이고 날카로운 독을 삼킨 것처럼, 굳게 닫힌 입술 너머의 식도 아래가 강렬하게 타오른다. 잔잔하게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던 들판은 불꽃에 이끌려 하염없이 타들어가고 있다. 사랑, 사랑이라니. 제겐 그 감정이 말하는 순수함이나 열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대답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씁쓸한 웃음 뒤에는 절망만이 남는다. 마지못해 털어놓은 고백은 별 볼 일 없는 남자의 뒤늦은 독백에 불과했다.
   
   “……그래. 널 사랑해, 세이레니아.”
   
   그 말에 세이레니아가 만족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우리는 함께 죄를 지은 거야. 신에게 자신을 바친 너는 멋대로 나를 사랑했고, 나는 거짓된 사랑을 피하고자 남편을 죽였지. 신도 알지 못하게 그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 모든 죄악을 한데 담아 모은 인간의 추악함이 여기에 있다. 결국 직결되는 모든 원인은 사랑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감정이자 가장 악랄한 감정. 어린 날의 순수한 애정은 차디찬 현실과 인간들의 악의로 얼룩지고 더럽혀진 지 오래, 이제 와 두 손을 잡는다 해도 몸을 던질 곳은 피바다뿐이므로.
   
   지금쯤 이 모든 음모를 만들어낸 진짜 범인은 즐거워하며 웃고 있겠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그늘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한낱 희생양으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세이레니아는 자하라에게 손을 맡기는 대신, 두 팔을 높이 들어 철창을 두드렸다. 쇠와 쇠가 부딪쳐 내는 기분 나쁜 소리가 고요한 감옥에 울려 퍼지자, 자하라는 당황한 얼굴로 세이레니아를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저지하려 했으나 세이레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소란함을 느낀 간수들이 달려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꺼져! 주교라는 사람이 나를 구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회개하라고 하다니!”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했다. 연기에 깜빡 속아 넘은 간수 하나는 세이레니아를 중재하기 위해 곤봉을 휘둘렀고, 다른 한 명은 자하라의 팔을 잡아끌고 감옥에서 벗어났다. 당혹감에 가득 찬 얼굴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세이레니아는 그를 일부러 외면했다. 이것으로 된 거야. 어차피 이게 내 운명이었던 거야……. 눈을 감고 차가운 바닥에 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조용해진 세이레니아를 보며 간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한마디보다도 쓰라린 손목에서 붉은 피가 이는 것 같았다.
   
   이제 다음 날이면 사형을 치르겠지. 운이 좋으면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숨을 끊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효시를 당할 것이다. 아니, 이걸 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결말은 무엇일까? 세이레니아는 품에 감춰두었던 향유를 꺼냈다. 초야 때 신랑의 발에 붓기 위한 용도의 기름이었다. 아직 뚜껑도 열지 않아 향이 가시지 않은 기름을 볏짚에 졸졸 따르고,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철창 바깥으로 던졌다.
   
   지난겨울 추위에 떨던 누군가가 성냥개비로 몸을 녹이고자 한 모양이다. 반 이상 타버려 그을린 성냥 두어 개가 쓰레기통에 섞여 있었다. 뜨거워진 손목을 땔감 삼아 수십 번을 연달아 문지르자 강렬한 통증과 함께 성냥에서 불이 일어났다. 그것을 기름 부은 볏짚에 던져 넣은 뒤, 세이레니아는 까맣게 타기 시작하는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열로 수갑이 녹지는 않겠지. 그저 손목이 미친 듯이 아릿할 뿐이었다.
   
   불이 쉽게 번지지는 않을 테지만, 고요한 새벽. 간수들도 잠시 자리를 떠난 참이니 이 감옥을 삼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화력을 키울 것이 부족하면 제 옷이라도 찢으면 된다. 누군가 먼저 불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면 남은 향유 병이라도 던져 그자의 머리를 깨버려야지. 홀로 누명을 쓴 채 떠나는 건 제 성정에 맞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죄악을 퍼뜨리는 수밖에. 지옥과 악마는 미리 우리를 환영할 것이다. 불에 휩쓸려 타오르는 잿더미들의 향연을 보면서.
   
   어느 누군가는 이 죽음을 부정하며 제 이름을 부르겠지만, 결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뒤에서 해왔던 모든 일들에 괜찮다는 여지를 주지도 않을 것이며, 만일 이로 인해 젊은 주교가 자신을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외면하기로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진정으로 날 사랑했다면 나를 두고 먼저 떠나지 말았어야지.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낙원으로 향할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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