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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and Thorn

   그해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내렸다. 성탄절과 새해가 다가올수록 거리는 추위를 잊은 것처럼 붐비곤 했다. 거리 곳곳에는 따뜻한 빛의 전구로 장식되고,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들어선다. 눈이 내리고 또 그 거리를 하얗게 물들이면 골목마다 아이들이 세워둔 눈사람이 자리하곤 했다. 여기저기 오고 가는 온기 속에 거리에 눈이 쌓일 틈이 없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온 도시가 새하얬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길 한편에 마차를 끈 말이 멈춘다. 이 새하얀 도시에 일시적으로 그어지는 선이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연다. 마차 밖으로 먼저 내린 남자의 구두에 새하얀 눈이 묻었다. 남자의 손을 잡고 한 명이 더 내리면 근처에서 대기하겠다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은 닫힌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림에도 가게 안의 붐비는 목소리들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들었어? 옆 블록에서 또 시신이 발견되었다면서요?"
   "그러게요~ 어디 무서워서 혼자 외출이나 하겠어요."

   
   한쪽 벽면에 각종 꽃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꽃잎의 잔향이 가게를 채우는 목소리들과 함께 묻어 나왔다. 이리 기척을 눈치채지 못해서야 혼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죽겠군. 짧은 상념이 남자의 머리를 스쳤다. 가게에 들어온 뒤부터 남자의 낯빛을 살피듯 힐긋거리던 여자가 부러 남자의 시선을 끌듯 그 앞을 말없이 지나간다. 
   
   여자는 마른 꽃잎들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마른 장미가 든 병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이건 어떠냐는 물음 대신이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연다.
   
   "당신이 고른 것이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말할 것을 알면서 물으려 합니까."
   "그래도 매번 묻고 싶어하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색이 다른 두 자색의 시선이 마주해도 좋다, 싫다와 같은 명확한 답은 내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알고 있었기에 물음을 부러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함께 외출을 할 때면 종종 있던 일이다. 외출을 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대화는 항상 오고 갔다. 여자는 남자에게 그 기호를 물었고, 남자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기보단 어느 목적을 위해 육성된 사람이란 그랬다. 그래서 항상 남자는 여자가 좋다면,이라는 전제로 답을 하곤 했다. 실제로 남자에게는 그것이 가장 기호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마시고 가도 됩니까?"
   
   병을 들고 카운터로 가던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방문한 가게는 넓었다. 한 쪽에는 직접 찻잔과 찻잎을 고를 수 있게끔 구비되어 있었으며, 우측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하얀 천사상과 각종 세공품, 보기 좋게 장식된 식물과 푹신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때문에 여유를 즐기려는 이들에게, 특히 젊은 여성층에게 인기가 많은 가게 중 하나였다. 거리를 활보하는 인구가 적다고 해도 이 가게는 붐빌 만큼 말이다. 그런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여기서 잠깐 있다 가겠다는 말은 의아했으나, 남자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커다란 창문 너머에는 다시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티포트를 기울여 잔을 채우면 장미 향이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 근처를 가득 채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설경. 퍽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나 여자는 그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렌."
   
   그 생각을 뒤로하고,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 이름을 부름에 남자는 기울였던 잔을 내린다. 예, 하고 정갈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여자는 다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싱거운 소리를 했다. 여자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향함에도 남자의 시선은 그대로 여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요즘 주변에 사고가 있다고 하더군요."
   
   다시 침묵이 깨진다.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남자, 그러니까 렌 쪽이다. 렌의 목소리에 여자의 시선이 차창 너머에서 떨어진다. 여자는 내려두었던 잔을 들어 올렸다. 루시아. 하고 그 이름을 부러 다시 부르면 자색 시선이 색이 다른 자색의 눈동자를 찾는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항상 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시아가 렌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것이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때였다. 루시아는 그 버릇을 모르고, 렌은 루시아의 그 버릇을 안다. 
   
   "연쇄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모양이니 앞으로 외출할 땐 오늘처럼 함께 나오도록 하죠."
   
   이는 통보다. 렌의 말에 루시아의 시선은 여전히 렌의 눈동자를 향한다. 평소의 루시아였다면 그 이유를 묻거나, 순응하는 등 답변만큼은 내놓았을 텐데 이번엔 찻잔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였다.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 렌은 루시아가 바로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역시 예측한 대로였다. 
   
   인근 거리가 조용한 이유도 렌이 말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피해자는 모두 젊은 여성. 젊은 여성이라는 점 외에 그들을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점은 없었기에 불특정 다수의 여인들의 입방아에 더욱 자주 오를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많은 여인들은 두려움을 토로했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외출을 할 경우 무리를 지어 행동하곤 했다. 이러한 장소 역시 그들의 피난처인 셈이다. 
   
   "걱정입니까."
   
   루시아는 다른 여인들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루시아가 놓인 환경 탓이었다. 시린 겨울보다 찬 삶을 살아왔던 터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며, 그를 렌은 충족시킬 수 있기에 그는 루시아의 곁에 남았다. 루시아의 뒤늦은 물음에 렌은 똑같이 잠깐의 간극을 두고 답한다. 예. 그렇습니다. 
   
   일순 루시아의 눈동자가 렌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시선이 느껴졌던 탓이다. 대각선 뒤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여인의 시선이었다. 겨울과 대조되는 싱그러운 녹음을 닮은 그 시선은 렌에게로 향한다. 그저 호의와도 같은 따사로운 시선이라 루시아는 불쾌했다. 그 시선의 움직임을 렌의 기민한 시선이 쫓았다. 루시아의 시선이 되돌아오기 전, 렌이 루시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먼저였다.
   
   "차가 입에 맞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아까 주문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서."
   
   "그럼 주문하고 이만 돌아가죠. 주변이 소란스럽군요. 소란스러운 것은 싫어하지 않습니까."
   
   렌은 그 찰나에 루시아의 눈에서 불편함을 읽었다. 가게 내부에 클래식 음악과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하모니처럼 섞여들었다. 저쪽에 앉은 신사분 봤어요? 어쩜~ 오늘부터 기도를 드리면 저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들이 귀에 거슬렸다. 루시아의 귀에 무엇이 거슬리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그가 불편함의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서 불편함을 읽었기에 평소 소란스러운 것을 즐기지 않는 성정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의 말에 루시아는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 다가서니 가게의 주인은 여상스레 웃는 낯으로 찾는 물건이 더 있으시냐고 물어왔다. 그에 자연히 렌의 시선은 루시아에게로 향한다. 주문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고 말한 직접의 대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그 시선을 읽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찻잔을 사고 싶다고. 이왕이면 검은 장미가 그려진 찻잔을. 주인은 난색을 표했다. 붉은 장미가 그려진 것은 있었으나 검은색은 없었다. 애초에 검은 무언가를 찾는 여인이 적었다. 그래도 주인은 제 남편이 직접 찻잔을 만드는 것이니 주문을 하겠냐고 물어왔다. 두 사람은 찻잔을 주문하고서 가게의 문을 나섰다.

*

   "루시아."
   
   렌이 커튼을 묶고 있는 끈을 풀며 루시아를 부른다. 눈이 그친 밤하늘엔 달만이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그 부름에 루시아는 침대에 오르며 응한다. 
   
   "외출할 땐 혼자 나서지 마십시오."
   
   렌이 창문의 커튼을 쳤다. 달빛마저도 가려졌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인 오르골의 뚜껑을 열면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렌은 다시금 루시아의 눈을 마주한다. 루시아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만 두 번째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예."

   "주무십시오."
   

   이불을 끌어올리는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방 안에는 완연한 침묵과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에 방의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

   겨울의 새벽은 어둡다. 모든 생이 더욱 늦게까지 온기를 찾아 나서지 않기에 더욱 어두웠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는 검은 구두. 눈이 내리는 날은 흔적이 남았다. 누군가의 발자취가 그 행선지를 명백하게 그리고는 했다. 눈 위로 찍힌 발자국을 쫓아가면 그 끝에는 머리에 구멍이 나있는 남자가 쓰레기통에 거꾸로 쳐박혀 있었다. 조금 전의 그 골목에는 총성은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큰 그림자에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자가 하나 있었을 뿐이다. 
   

   "다, 당신 뭐야."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폼이 어설펐다. 총구가 그에게 향한다고 한들 그림자에겐 그 모습 자체가 위협이 되지 않아 되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가로등 아래로 비친 자색 눈동자가 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낯을 훑었다. 렌은 가게에 들어선 순간부터 한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창문 너머를 바라볼 때, 그 창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선. 마차에 오를 때는 마차의 방향을 확인하는 것을 보았고, 커튼을 치기 전 반대편 건물에서 집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총구를 겨누고 있던 이 남자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았던 것이다. 
   
   "……."
   "당신한테는 볼일 없어! 나는 단지!"
   
   "이유는 충분한 것 같군."
   

   렌의 시선에 다급해진 남자는 입에 하나의 부정을 올린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렌의 손에 들린 총은 불을 뿜었고, 남자는 쓰러졌다. 총성은 없었다. 죽은 이 남자는 결국 루시아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사회가 뒤숭숭하니 작은 사고 하나쯤은 함께 묻혀 뒤덮일 수 있을 테니까. 렌은 남자의 힘을 잃고 축 처진 손 아래로 단도 하나를 떨어뜨렸다. 

*

   쨍그랑,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군다. 녹색 눈동자는 두려움에 찬 나머지 크게 흔들렸다. 스테인드글라스 아래로 칼날이 빛나던 순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 칼을 든 손을 뿌리쳤다.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지르려던 그 자그마한 입술은 어떤 비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컥 피를 토했다. 
   
   "그 칼은 깊은 상처를 낼 수 없습니다."
   

   녹음을 닮았던 그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 눈동자에 비친 것은 낮에 자신이 눈에 담았던 남자의 검은 구두였다. 스테인드글라스와 퍽 잘 어울리는 신의 사자를 닮은 정갈한 목소리는 바닥에서 꺼져가는 생명이 아닌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서있는 이를 향해 울린다. 
   
   "그러니 한 번에 급소를 노리지 않으면……."
   
   렌은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손에 그 단도를 올렸다. 그 손이 다시 단도를 쥘 생각을 하지 않자, 자신의 손을 겹쳐 손을 닫았다. 
   
   "당신이 위험해집니다. 루시아."
   
   검은 장갑 아래로 느껴지는 손은 적어도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물어오는 목소리 역시 떨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더 나아가 죽이려고 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목소리에서는 이 상황의 익숙함이 묻어났다. 
   
   "알고 있었습니까?"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침대 한쪽을 누르고 있는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 방의 문이 열리는 것. 발소리는 단순히 복도를 돌아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향한 것. 그 모든 것을 렌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평생을 주변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왔으므로 루시아의 그런 행동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를 행동의 뒤를 밟고, 방관했을 뿐이다. 
   
   "뒤처리가 어설프더군요."
   
   검은 손가락은 루시아의 뺨에 튄 피를 훔쳐냈다. 렌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행동은 모두 렌이 알고 있었으며, 그 사건을 덮은 것도 그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역시 그 과정 중 일부였다. 한 번에 찌르지 못한 바람에 여자는 저항을 했고, 일이 커지기 전에 렌의 손을 빌리게 된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던 자색 시선이 다시금 그의 얼굴로 향한다. 그리고는 이내 피를 흘리며 차게 식어가는 시신으로 그 시선이 옮겨간다. 루시아는 그 여인의 시선을 기억한다. 
   
   루시아는 그 물음에 자신의 내면을 직면한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랑스러운 눈빛이 향하는 방향이. 그 시선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꼈다. 그는 단순한 자신의 불안이며, 시기였다. 그에게 닿는 시선은 자 뿐이었으면 하는 독점욕. 루시아는 말을 골랐다. 어떤 말을 해도 렌은 떠나지 않을 것이었으나, 루시아는 언제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까."
   
   다시금 간극. 자색 시선이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듯 그 눈동자로 향한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기라도 한 것인지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을 받아 그대로 성스러운 빛이 두 사람을 비춘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빛 아래 가시 돋친 말이 움튼다. 
   
   "다른 이가 그 눈에 렌을 담는 것이 싫습니다."
   
   그 눈을 마주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루시아 례브 벨레노프는 다른 이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렌 메이를 바라보는 것이 싫다고. 루시아의 말에 렌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습니까, 하고 평이한 어조로 대화를 끝맺었을 뿐이다. 이만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렌은 루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두 발소리가 성당을 울렸다. 

*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의 대화는 없었다. 그저 밤공기가 찼기에 렌이 외투를 벗어 루시아의 어깨의 얹은 것이 전부였다. 현관문이 닫히고, 냉기를 떨쳐낼 때쯤 렌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을 지키지 않았더군요."
   
   그 말에 루시아의 얼굴에는 의문이 스쳤다. 그리고 이내 렌의 눈치를 보듯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렌은 부러 혼자 외출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루시아의 뒤를 밟는 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제가 렌을 곤란하게 했습니까?"
   "예. 곤란합니다."
   
   그 곤란하다는 한 마디에 죄책감이 생겼다. 사람을 몇이나 죽였을 때는 들지 않던 것이, 곁에 있는 이의 말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생겨난다.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다음부터 차라리 내게 죽여달라 말하십시오."
   
   미안하단 말을 뱉으려던 순간 그 말을 잘라낸 것은 순전히 렌의 의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자르고 단단하게 박힌 렌의 말에 루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도 마시겠습니까."
   
   그 불안을 조금 즐겨도 될 텐데 렌은 조금 아껴두기로 한다. 나약한 사람은 금방 지쳐버리는 것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의 가시는 무엇이든 베어낼 것처럼 날카로우나, 언제나 빛 아래에선 그 가시를 접는다. 
   

   루시아의 대답은 없었으나 그 시선은 긍정과 같았기에 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찬 몸을 녹이는 것이 먼저였다. 창문 너머로 동이 트고 있었다. 

   곧 거리는 떠들썩해질 것이다.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났으며, 동시에 범행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흉기를 지니고 있던 남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권총마저 소지하고 있었으니 이로 여론은 살인 후 용의자가 자살한 것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로 살인사건도 막을 내릴 것이 자명했다. 아침 햇살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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