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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5

  “...그래서 새벽에 지원나갔던 세 명은 오후에 출근합니다. 이외에 별다른 전달 사항은 없고, 자세한 사건 경위와 전체 공지사항은 메신저로 각자 확인하세요. 이상.”


   오늘 하루도 힘냅시다, 팀장의 한숨 어린 격려를 끝으로 의료팀 오전 브리핑이 끝났다. 동료들이 칼같이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는 가운데, 니케는 느릿느릿 움직여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오늘따라 사무실의 빈자리가 유독 눈에 두드러졌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겠지. 의료팀의 인원수가 사원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팀장의 지론 하에 오르도는 힐러 증원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 반차와 등교로 결원이 꽤 되는 지금도 책상 앞에는 여덟 명이나 앉아있다. 그럼에도 니케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제 생각에 사족을 달고야 말았다. …사고만 안 터진다면.
   컴퓨터를 켜니 사내 메신저에 알림이 두 개 떠 있었다. 하나는 일상적인 내용에 대한 공지 ─여름이라 전기세가 많이 나가니 급히 출동하더라도 에어컨을 꼭 끄고 나갈 것, 근무 시간 외에 범죄자를 체포했을 때 사람과 함께 보고서까지 작성해서 경찰에게 넘겨야 특별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것 등─ 였고 다른 하나는 팀장이 말한 사건 경위서였다.
   요약이 특기인 팀장이 브리핑 시간에 사건 설명을 생략하는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이미 마무리 된 사건이거나, 사안이 하도 심각해서 간략한 전달이 불가능한 수준이거나. 유능한 의료반이 셋이나 지원나갔으니 당연히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후자였다. 새벽 3시 경 G교도소에서 죄수 탈옥, 현재 추적 중. 니케는 제목을 읽자마자 미간을 구겼다.
   G시의 교도소에는 위험한 특기를 가진 중범죄자들을 수용한다. 수감자가 들어올 때마다 감방을 새로 설계하고 특기의 상성을 고려하여 교도관으로 부임시킨다고 하던가. 장소의 특수성과 교도관들의 철저한 대응으로 상황은 빠르게 진압되었으나 기어이 탈옥에 성공한 죄수가 한 명. 하필이면 그게 과격 테러조직 소속 폭발 특기자였다. 2년 전에는 히어로가 아니었던 니케조차도 뉴스에서 이름을 봤을 정도의 흉악범.
   사건 경위를 훑은 적갈색 눈이 현재 상황을 꼼꼼히 확인했다. 행방은 알 수 없지만, 사이코메트리가 흔적을 분석한 결과 수도권 중으로 이동 중. 미치겠네, 어쩐지 팀장님 표정이 유난히 안 좋더라니. 세 페이지짜리 문서가 끝나고 스크롤을 내리자 범죄자의 이력만 네 페이지가 더 있었다. 벌어진 입매 사이로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이 새어나왔다. 
   옆자리의 동료가 그 소리를 듣고 시선을 던졌다. 짧은 눈빛교환만으로 경멸의 감정을 나눈 두 히어로는 동시에 개탄했다.


   “짜증 나.”
   “이게 말이 되나…”


   히어로라면 매사에 차분하고 신중해야한다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달랐다. 그냥 폭탄마도 위험한데 대형 건물 하나를 통째로 가루로 만들 능력이 있는 폭발 특기자라니. 밝은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던 니케는 탁 소리가 나도록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요일 아침부터 충격적인 일을 겪었지만 퇴사를 할 수는 없으니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어디 가?”
   “커피요.”
   “요 앞 휴게실은 커피머신 고장 났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케는 동료의 친절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복도로 나섰다. 고개를 돌릴 것도 없이 왼편에 불 꺼진 휴게실이 보였지만, 애당초 그곳에 갈 생각도 없었던 그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두 층 아래로 내려간 후 쭉 걸어가노라면 어두운 복도 중간쯤에 유일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문틈이 있다. 아, 오늘도 사람 있네…


   “니케 왔어?”
   “...오셨습니까.”
   “니, 니케 좋은 아침.”


   이 층은 출근하자마자 뛰쳐나가는 현장팀 사무실이 절반, 출근도 거의 하지 않고 외근만 도는 출장팀 사무실이 절반이라 휴게실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니, 없었다. 휴게실에 홀로 죽치고 있던 니케를 처용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더라면 한번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났을텐데, 자타공인 오르도 마당발인 처용은 이곳에 자기 팀을 한 명씩 끌어들이더니 아예 점거해버렸다.


   “출동하셨을 줄 알았는데, 여기 계셨네요?”
   “아아, 니케도 공문 봤구나? 현장팀의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있어야 하잖아.”


   하긴 그렇네요,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니케는 덩치 큰 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덜너덜한 월요일의 심신으로는 아스트라와 키린을 뚫고 커피머신 앞까지 도달할 힘이 없었다.


   “키린, 라떼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 아이스 말고 따뜻한 걸로.”


   한참 선배에게 시키느니 동기에게 부탁하는 쪽이 양심이 덜 아프다. 마음 같아서야 차갑게 마시고 싶지만, 그쪽의 제조 과정이 더 번거로우니까. 키린에게 텀블러를 건넨 니케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브리핑 시간에 팀장님이 자세히 안 알려주시길래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사안이 좀 크지.” 


   마침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며 처용이 넉살 좋게 웃었다. 이거, 남의 브리핑 시간에 끼어든 기분인데. 이에 떨떠름한 기색을 표하려는데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아.”
   “선생님도 계셨습니까.”


   니케는 막 들어온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롯 씨가 여기를 다 오시네, 하는 생각이 드려는 찰나 처용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그렇지.


   “일찍 왔네? 법무팀에 들렀다 온다면서?”
   “상반기 정산 시기라 바쁜데다 아직 자료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일단 왔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기다리면 다들 불편할 듯 싶어서.”
   “너나, 그쪽이나 고생이네, 앉아.”


   고마워, 니케가 커피를 받아든 후 어색한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처용이 화제를 이었다.


   “롯, 롯도 공문 봤어?”
   “무슨 공문이요.”
   “이건 민간인한테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럼 말하지 마십시오.”
   “넌 오르도 고문이잖아? 전직 히어로고. 그럼 상관없지.”
   “안 듣겠습니다.”
   “─어제 새벽에 탈출한 특기자 말인데,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고층 빌딩 위주로 범행을 저질렀다나 봐. 5년 전에 일어난 명일 빌딩 폭파 사고 있잖아? 그것도 사실,”
   “......”


   롯의 싸늘한 눈빛을 못 본 체 하며 ─아마 못 본게 맞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다니니까…─ 처용은 집중하라는 듯이 손뼉을 짝짝 쳤다.
   “걔가 한 거라고 하더라고, 내 아는 사람이. 그 일로 체포된 거고. 특기가 특기다보니까 히어로랑 경찰 뿐만 아니라 소방서 쪽에도 연락이 갔을거야. 병원 쪽은 아마 통지가 없었을것 같은데… 그쪽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한번 떠봤거든.”


   저 사람은 지인이 대체 몇이나 있는 걸까. 니케가 커피를 반쯤 비우는 동안 ‘내가 아는 사람이’ 는 몇 번이고 이어졌다.


   “근데 이 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민간에 알리는 편이 낫지 않나? 혼란이야 생기겠지만 그래도 시민 안전이 중요하지.”
   “혼란도 혼란이지만, 모방범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럼 고층 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민간인들 통제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알지.”


   정보화 시대니, sns니 하는 상관없는 화제가 나오기 시작하자 니케는 시선 끝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커피만 가지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업무 시간에 불가피한 공백이 생긴 법률고문 롯이나 사무실을 옮겨오다시피 한 현장팀 셋과는 달리 제게는 할 일이 남아있다.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다음에 봐.”
   “다음에 뵙겠습니다.”
   “또 와.”
   “또 뵙지요.”
   한 손에 커피와 핸드폰을 몰아 쥐고 휴게실을 떠나려는 찰나, 반쯤 남은 라떼에 때아닌 파문이 일었다.
   지이잉, 지이잉.
   

   [D시 방향 상업지구 연속 테러 발생]
   [비상대기조 제외 의료팀 전원 출동.]

   [D시 방향 상업지구 연속 테러 발생]
   [출동할 수 있는 현장팀 전원 지원 바람.]

   
   날카롭게 고막을 울리는 익숙한 호출음에 키린은 자연스레 핸드폰 위로 뜬 문구를 확인했다. 그리고 ‘테러’라는 두 글자를 확인하고 기대서 있던 벽에서 몸을 물리던 차,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과 시선이 맞닿았다. 몇 초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 서로 눈빛을 교환한 세 명은 곧바로 일사천리 하게 움직여 출동 준비를 마쳤다. 제일 먼저 휴게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간 건 아스트라였다. 육체파니 따로 챙길 게 없기도 했고, 서랍에서 되는대로 집어 든 부적 등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움직이다가 삐끗해 넘어질 뻔한 처용을 붙잡아 세우는 건 키린의 몫이었다.


   “조심하세요.”
   “아차, 땡큐, 땡큐- 얼른 가자.”


   저보다 한참이나 큰 후배의 어깨를 짧게 두드리곤 나온 처용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제 친구 옆에 섰다. 휴게실 바로 앞 복도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건지, 네 곳에서 내려가기 버튼에 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서도 비상계단 쪽을 힐끗거리는 아스트라를 보며 키린은 아까 전 도착한 메시지를 마저 읽어내렸다. 짧고 굵직한 제목 밑으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테러로 인한 상세 피해 구역이 간결히 정리되어 있었다. 상가 골목 두 곳에 폭발 화재, 사거리 도로 위 육교 하나가 붕괴... 수도 외곽, 더군다나 월요일 아침이니 인파야 말할 것도 없을 장소와 시간대라 더더욱 치명적일 사고였다. 처용은 삐딱하게 한쪽 다리를 떨면서 재촉하듯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수도 외곽이면 당장 출발해도 조금 걸립니다.”
   “날아갈 수 있는 애들한테 부탁해 볼까?”
   “비행팀은 이미 출발했을걸…”
   “그렇겠지… 아, 니케 그럼 나중에 보자!”
   “... 그냥 같이 갈게요.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


   뒤따라 나오며 미간을 찡그린 채 메신저 화면을 쳐다보던 니케는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브리핑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고작 커피를 마시고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 잠깐 새에 최소한의 인력을 뺀 전원이 현장으로 출동해야 할 판국이 됐다는 소리였다. 사태가 심각해진 만큼 지금 나가 있는 의료팀 인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려했던 사고가 결국 벌어진다는 게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니케의 동행까지 정해지고, 긴급 메시지의 내용을 읽으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네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레 맨 뒤에서 휴게실 문을 닫고 나오던 이에게 향했다.


   “―곧 있으면 법무팀 회의에 가봐야 합니다만…”
   “출동할 수 있는 히.어.로. 전.원-!”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하는 처용에 결국 롯도 입을 다물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이동 수단을 두고 몇 차례 의견이 오고 갔지만―아스트라의 특기로 날아가자는 말은 가볍게 무시됐다―긴급 호출을 받아 우르르 몰린 대기조 히어로들로 복날 시장판보다 더한 아수라장이 된 로비를 보곤 별 말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버튼이 다시 눌러졌다. 지하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출구가 로비보다는 넓다는 판단이었다. 
   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무섭게 튀어 나간 아스트라는 곧바로 승합차들이 주차된 쪽으로 달려갔다. 내려오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더니. 어정쩡히 남은 이들도 서둘러 뒤를 따라갔고, 얼마 안 가 익숙한 회색 봉고차의 닫힌 문 앞에 선 채 문고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그를 다시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금세 이쪽을 보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며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는 게 급한 마음에 (당연하게도) 차 문이 잠겨 있으리란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근데 또 이 차야?”
   “이게 제일 천장이… 높잖아.”
   “키는 챙겨왔습니까?”
   “엇, 그게…”


   아스트라의 머쓱한 웃음에 한숨을 쉬며 자기 손에 든 차 키로 문을 연 니케는 열쇠를 키린에게 건넸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움직일 때면 자연스레 운전 담당은 그가 했으므로. 금방 화색이 되어 벌컥 조수석 문을 연 아스트라를 시작으로, 니케, 키는 언제 챙긴 거야? 셋이 먼저 따라가 버려서 제가 경비실에서 받아왔죠. 역시 니케가 최고야. 알았으니까 빨리 안에 들어가 봐요. 키린 씨 위치는- 소란스럽게 전원을 태운 차 안은 다섯으로도 벌써 내부가 꽉 차 보였다. 그제야 출발한다는 짧은 선언 뒤 매끄럽게 주차장을 벗어난 차량은 빠르게 도로를 달려 이동했다. 위기의 현장은 히어로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
   그래, 그랬어야 했다.
   


   빠아앙― 
   삐옹- 삐옹- 
   웨애애앵-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는 경적의 불협화음이나, 시끄럽게 귀를 때리는 경고음 소리,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다급한 사이렌 소리마저 하나에 장대한 합주회 같았다. 오롯이 청자의 감정을 격하여 인내심을 바닥나게 할 목적으로 기획된 듯, 그 사악한 음모에 잠자코 조수석에 앉아있는 늑대 혼혈은 반쯤 넘어간 듯하고... 그의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진 두 주먹은 어느새 관절이 하얘질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역시 길이 막히는군요.”
   “아무래도... 씁, 이래서야 도착하려면 30분도 더 걸리겠는데.”
   “저희 뒤로 오고 있던 의료팀은 그래서 헬기로 이동 중이래요.”
   “하필이면 여기서부터 꽉 막히네. 우리 쪽에서 먼저 도착하는 건 그나마 비행팀 애들인가...”
   “소방서와 경찰 쪽에서 테러 현장 주변 도로를 통제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 여기가 그 상업지구에서 가장 빨리 통행 되는 도로이니... 빠져나오는 차들만으로도 상당히 붐빌 테지요.”
   “하아- 역시 이런 때는 하늘로 가는 게 나을 걸 그랬나? 키린, 너 헬기도 조종할 줄 알지 않아?”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되려 더 불을 붙인 것인지 아스트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차하면 차 문도 박차고 튀어 나갈 심산으로 보였다. 어쩌면 머릿속으로는 이미 그랬는지도 모르지. 키린은 힐끔 제 옆좌석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느리게 대꾸했다.


   “본부 헬기는 의료진 이송에 대부분 동원되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겁니다.”
   “현장에 인명구조가 우선이니까요.”
   “하긴, 거기 이미 도착해 있는 구조대도 아직 있을 테니까, 그래도-”


   끙 앓는 소리를 내던 처용의 시선은 몇 대를 거쳐 앞서 있는 옆 차로의 소방차에 머물렀다. 요란하게 깜빡이는 경광등이 무색하게도 한 치의 틈도 없이 4차선을 빽빽하게 채운 자동차 숲을 그 육중한 차체로 헤쳐나가기엔 역부족이었는지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다. 에에엥 하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애달프게 들리기까지 했다. 분명 저기 타고 있는 소방대원의 속도 타들어 가고 있겠지. 돕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조차 현장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희극이 따로 없었다.


   도로 위에서 내버리는 시간만큼 차 안의 긴장감도 슬금슬금 고조되어 점차 침묵이 내려앉자 운전대를 쥔 키린은 조용히 라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시간 교통 체증 중계라도 간간이 듣는다면 그나마 덜 답답할 터. 그러나 때마침 틀어진 라디오 방송에서 테러 속보를 전달하는 엄숙한 디제이의 목소리가 나오리라고는 그라고 예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서 또 한 번의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네요. 아직 정식으로 보도된 바는 아니지만, 범인은 매우 위험한 테러 조직 소속에 탈옥범으로―〕


   “맙소사... 지금 이렇게 방송이 나가고 있다고?”
   “그래도 알려야 안전하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쪽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도 있을지 모르잖아.”
   “하지만 이런 걸 듣고 사고 현장으로 시민들이 더 몰려들 수도 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아니, 가족이나 지인이 근처에 산다면 당연히 걱정돼서 올 수도 있지 않나?”
   “그럼 그 민간인들 통제는... 누가 하는데?”
   “애초에 그 특기자가 탈출했을 때 바로 알리는 편이 나았다니까...”


   한순간에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키린은 도로 라디오를 끌까 잠시 고민했지만 원하던 교통정보가 나올 때까지는 그래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처용만큼이나 수다스러운 디제이가 남발하는 온갖 추측과 낭설이 뒤섞인 만담에 서라운드 사운드로 오가는 당장 할 일 없는 히어로들의 백분 토론에 유일한 청취자로 오 분간 보냈을까, 드디어 원하던 정보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현재 중남부고속도로 A시 방향, 강변서대로 G-12 구 부근 도로 전체가 일시적 마비를 겪고 있으며 수도 외곽순환도로 진출로는 붕괴물 청소 작업 여파로 하류 쪽까지 10km 구간 지체가 아주 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 백화점 인근에 화물차-버스 간에 추돌사고가 발생해 하위 3개 차로가 통제되고 있는데요. 때문에 B-13 구와, B-15 구 일대 통과가 많이 어렵고 서부대로 이동은 완전히 꽉 막혀있습니다.〕


   요컨대 앞쪽은 한동안 쭉 진전이 없을 거란 얘기였다. 옆에서 같이 듣던 아스트라는 결국 못 참겠단 듯이 안전벨트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다.


   “그냥 뛰어갈까…”
   “마음은 이해하는데 아서라.”
   “아까 내 특기로… 날아가자고 한 건, 너였거든?”
   “10km는 더 남았는데?”
   “그 정도야 눈만 안 깜빡이면… 한번에도 갈 수 있어…”
   “우리 전부를 데리고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아스트라.”
   “... 세 명까지는 될 것도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난 왜 보는데? 버리고 가려고? 그럴지도…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자 니케의 한숨 소리와 익숙하게 중재에 나서는 롯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좁고 한정된 장소에 계속 가만히 멈춰있었으니… 어쨌든 누구 한 명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그의 눈에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소방차가 보였다.


   “어차피 여기서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습니다, 일단은 다음 사거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
   “롯 씨,”


   갑자기 이름이 불린 중년의 교수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백미러에 비치는 운전사와 눈을 마주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상대가 누군가의 말을 끊고 입을 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의아한 눈초리였다.


   “혹시 도로교통법도 잘 아십니까?”
   “예, 기본 조항은 다 알고 있습니다만…”
   “긴급자동차 준수사항이 따로 있습니까? 특례 범위에 사유지 출입 및 비 도로 주행이 포함되는지도 알려주십시오.”
   “오르도 사내 차량은 전부 지방경찰청에 신고해두었으니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2조가 규정하는 범위 내외입니다. 다른 두 가지는 현행법상 국가 및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 도로에 포함되지 않으니 전제 조건에서 애초에 제외되고요. 한데 그건…”


   거진 척추반사로 술술 대답하던 교수의 말소리는 짧은 탄식과 함께 저절로 멈췄다. 그 후 얇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말없이 눈빛으로만 의견을 주고받던 동안 이 묵언 소통에 참여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낀 원조 소통의 대가가 불만스레 끼어들었다.


   “뭔데? 둘만 알고 있지 말고 우리한테도 좀 알려줘.”
   “키린 씨가… 그,”
   “요행 좀 써보겠다 했습니다.”


   어쨌든 간결한 결론은 그랬다. 스마트폰에서 원하는 앱을 찾았는지 곧바로 설치를 누른 키린은 똑같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처용과 아스트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닮은꼴이었다.


   “서쪽으로는 이동이 어려우니 아예 돌아서 북동쪽으로 빠르게 우회해 갈까 합니다.”
   “아, 아예 바깥으로 돌아서…?”
   “네. 자치구 바깥쪽으로 나가서 차라리 반대편으로 진입하는 게 시간이 덜 걸릴 것 같아서요.”
   “근데 그러려면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아? 여기선 유턴은커녕 우회전도 어려워 보이는데…”
   “네, 그래서―” 


   채 질문에 대답하기 전, 목표물이 움직이는 걸 포착한 키린은 기어를 바꾸고 핸드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계속 바깥에서 울리던 것과 같은 사이렌 소리가 이제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고, 소방차가 보도로 빠지면서 생긴 여유 공간으로 앞차들이 연달아 전진해 곧 그들의 차례가 되자 키린은 핸들을 꺾어 상가 건물 사이로 난 좁디좁은 도로로 차를 몰았다. 갑작스러운 턴에 뒷좌석에서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던 처용은 그대로 몸이 쏠려 니케와 부딪쳤지만, 그리고 처용과 머리가 부딪친 니케의 입에서 된소리가 나왔지만, 20분 내리 굼벵이 속도로 기어가던 차가 이제야 속도를 내어 움직이고 있으니 그래도 잘된 일이리라.
   사이드미러와 벽 사이에 거리가 고작 손가락 몇 마디 밖에 안되는 좁은 골목을 거침없이 미끄러져 나간 승합차는 얼마 뒤 텅 빈 터로 빠져나왔다. 주변에 쳐진 바리케이드를 보니 새로 건물을 지으려 말끔히 밀어낸 것 같았다. 그렇게 흙먼지를 날리며 공터 반대편까지 달려 공사장 트럭이 나다닐 용으로 뚫어둔 듯한 입구를 지나, 첫 교차로에서 좌회전, 이어진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니 어느덧 그들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왕이면 속도 내기 전에 말 좀 해줄래?”
   “지금부터 계속 속도 낼 겁니다.”


   언짢은 기색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니케는 그의 빠른 시정에 되려 더 한마디 하고 싶어 보였지만 그저 안전벨트를 찰칵 맸다. 뒷좌석에 다른 두 사람도 안전벨트를 매곤 보조 손잡이를 꾹 잡았다.
   ‘빠르게’ 우회해 간다는 게 그냥 한 말은 아니었는지 고속도로 위에서 계기판의 속도는 130 밑으로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대각선으로 조금이라도 틈이 보인다면 거침없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전진했고, 시끄러운 회색 승합차의 무법자 같은 등장에 주변 자동차들은 슬금슬금 노선을 피해 움직였다. 기실 그 끼어드는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부드러웠다 만 외견이 그렇다고 해서 차 내부까지 평온한 건 아니었다. 네 사람은 핸들이 꺾일 때마다 필사적으로 몸이 쏠리지 않게 어디든 붙잡고 사투를 벌였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갈 필요는… 물론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진 않았다. 한시라도 일찍 도착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다만 곧이어 둥글게 꺾여진 순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누군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온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커브에서조차 속도가 그대로인 건 너무했다.


   
   그렇게 갖은 우여곡절 끝에 원래 예상 시간보다 15분은 일찍 도착해 차에서 내린 히어로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스킷처럼 반 토막이 나 무너져내리는 고층 빌딩의 모습이었다.

   “와… 이거 심하네.”


   상황을 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처용이었다. 그가 말하는 ‘심하다’라는 단어는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맞지만, 정확히는 그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꼭 안개처럼 잔뜩 퍼져있는 모습에 처용은 한 발자국 물러서서 눈가를 내리눌렀다.


   “처용 씨?”
   “으, 별거 아냐. 얼른 구조 안 하면 온통 하얗게 변할 거 같은데….”
   “별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요….”


   니케는 잠시 건물 쪽을 살펴보더니 이내 부상자가 있는 천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 의료반 쪽으로 가서 도울게요. 짧게 덧붙인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힐러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고 남은 네 사람 역시 각자의 자리를 찾을 준비를 한다.


   “아… 난 구조 현장 쪽으로 갈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스트라와 키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건물에 고정된다. 


   “롯이랑 나는 저리로 가고.”
   “그러죠.”


   처용과 롯은 지휘소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일상과 가까워진 이 현실에 그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평소보다 심각하고 처참한 상황이라는 건 그들 역시 알고 있지만… 그에 딱히 투정부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또 아니지 않은가. 그런다고 지금 벌어진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이 도착한 지휘소는 바깥만큼은 아니더라도  분주하기 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무전기, 칠판에 적히는 사망자와 발견자의 수, 온전했던 건물의 도면을 펼쳐놓은 커다란 책상, 그리고 그 주위에서 펜을 들고 구조 작전을 논의하는 소방대원들까지… 서로 인사할 틈도 없이 롯과 처용은 익숙하게 그들 사이에 자리 잡는다. 제임스, 건물 좀 살펴보고 와줘. 처용은 제 옆에 있던 혼에게 짤막하게 덧붙였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생존자 파악조차 어려워요. 영력 특기자 분이 오셨으니 일단 이건 한시름 덜었지만… 2차 붕괴나 폭발 가능성도 높고요. 그리고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빨라 화점을 찾아 끄는 것도 의미가…….”


   도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어지는 브리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상황이 나쁘다.’였다. 염력 특기자들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에 족해 구조 작업에는 제대로 참여할 수가 없었고 다른 히어로나 소방관이 진입하고 있으나 그것마저도 마냥 시원치는 않았다.


   “…해서, 상황 전달은 마쳤으니 저희는 현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손이 부족한 상태라. 지휘소는 부탁드리죠.”


   개중 가장 높은 직급으로 보였던 소방관은 짧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대원들을 이끌고 지휘소 밖으로 나섰다. 그들에게 길게 덧붙일 인사는 없었다. 못다 한 인사는 일이 전부 끝난 후에.


   “무전 채널이 어떤 식이랬지?”
   “전체는 1번, 건물 외부 구조 팀은 2번, 내부 팀은 3번, 의료반은 4번 채널이라 하더군요.”


   롯은 펜 하나를 들어 구조도의 세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을 덧붙였다. 


   “현재 그나마 안전하게 진입한 가능한 진입로는 이 세 곳입니다. 이리로 내부 구조자들을 빼내 오고 있고요. 하나쯤은 더 있는 편이 좋겠지만…….”
   “지반이 너무 약해서 위험하지. 언제 완전히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걸 억지로 잡아두고 있으니… 어렵네.”
   “그, 보이는 건 어떻습니까? 쓸만한 내용은요?”
   “잠깐만… 지금 들리는 말이 너무 많아서,”


   아이 울음소리가, 누군가를 찾으며 울부짖는 목소리가, 도와달라는 소리가, 살려달라는 말이… 이게 정말 들리는 것인지 귀신의 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앞에 서 있는 롯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는 저 혼자에게만 들리는 건 확실했다. 혼자 있을 땐 적적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 정신 사납다니까. 뭐, 눈과 귀가 될 존재가 널린 덕에 많은 수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서도.
   처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흔들고는 옆에 세워진 칠판을 응시한다. 적혀있는 사망자의 수는 발견된 시신의 수와 같다. 그 수는 스물일곱, 허나 그에 비해 처용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대충 어림잡아도…….


   “처용.”
   “응?”


   롯의 목소리가 들리면 처용은 생각을 끊어내고 그를 돌아본다.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건가 싶어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니 롯이 짧은 한숨과 함께 손수건을 하나 내밀었던가. 피 납니다. 툭툭, 그가 제 코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하자 처용은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굳이 그걸 또 손으로 닦아 피를 묻히고는 손수건을 받아든다.


   “킁, 땡큐….”
   “주변에 귀신이 많습니까? 이쪽은 보이질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보이는 것만 해도 적힌 수의 3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건 대충 조절해도 들리는 말까지 흐려지지는 않아서.”
   “조금 이상할 정도로 많은 수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한번에 죽을 수가 있습니까? 고층 빌딩이면 자재도 튼튼할 텐데. 그렇다고 쓰여있기도 하고.”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해, 처용은 손수건으로 코를 쥐고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도면에 적혀있는 대로라면 지진에 대비한 건물 구조에, 소방시설까지 완벽하게 구현된 신식 고층 빌딩일 터. 폭발이 강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버티는 게 정상이고, 불도 이렇게까지 번질 일은 없어야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두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남은 가설은 아마,


   “…여기 적힌 게 진짜가 아니라면?”
   “부실 공사?”
   “아무래도.”
   “허… 신식 건물이라 걱정을 좀 더나 했더니만.”


   오히려 문제가 커진 통에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롯은 무전기를 들어 1번 채널에 맞추고는 추려낸 정보를 정리해 전달했다. 현재 빌딩의 구조가 도면과 다른 것으로 판명, 기자재 역시 약할 가능성이 높으니 각 구조팀은 유의하여 구조 활동에 임하십시오. 이… 무전을 마치려던 롯을 향해 처용이 잠시 손을 들어 보인다. 그의 시점에선 허공에 무어라 말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보일 뿐이었으나… 이 생활도 익숙해진 지 오래다. 아마 혼에게 정보를 받고 있는 것일 테지.
   처용은 한쪽에 적혀있는 메모지에 글을 휘갈겨 적어 내려가고 롯은 그를 보며 무전을 이어갔다. 또한, 불법으로 개조된 공간이 있는 것을 확인. 도면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구조도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두 번 그려지고 그에는 각각 4와 8↑이라는 글자가 적힌다.


   “2층의 공용화장실 좌측 공간에 요구조자 넷, 5층의 창고 옆에 8명 이상. 내부 구조 팀은 신속히, 조심히 진입하십시오. 염력 특기자들은 혹시 모를 붕괴 사태에 대비하여 다른 활동 대신 떨어지는 건물 자재를 막는 것에 집중하여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롯은 잠시 메모지를 바라보았고, 이어 고개를 들어 처용을 응시했다. 처용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할 뿐이었나. 이미 어디로 도망쳐서 상황을 구경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도리어 매몰된 쪽인가. 부러 한숨이 무전기 너머로 들리지 않도록 버튼을 잠시 떼었다가, 목을 가다듬고 문장을 내뱉었다.


   “…테러범의 생존을 확인. 자세한 위치는 파악 불가하나 1층을 수색하는 인원과 외부 팀 쪽에서 수색을 부탁드립니다. 이상.”


   노란 메모지에는 ‘테러범 생존, 화재 직전 1층에서 특기를 사용한 것을 본 이가 있음.’이라는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재로 인한 희뿌연 한 연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유달리 발달한 혼혈 둘은 그 안에 섞인 비릿한 혈향을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방독면을 쓰며 방화복만 단출하게 챙긴 두 사람은 건물의 앞에서 도면을 파악한다. 무전기는? 연결 확인했습니다. 확보한 출구는 기억했지? 여차하면 부수고 나가겠습니다. 안돼, 염력 특기자들의 집중이 흔들리면 무너져. 중간에 사다리차로 내려오죠. 위쪽은 다른 팀이 갑니까? 응, 다른 서에서도 여러 팀 나왔다더라. 우리는 낮은 층. 간단한 문답으로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들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긴다.


   “진입합니다. 요구조자 확인해주십시오.”
   “주, 준비는 됐어요.”


   이미 수십의 사람을 잡아먹은 불길이 여태 활활 타오르건만, 키린과 아스트라는 망설임 없이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흔히 영화에서 말하는 히어로란 '빌런이라 칭해지는 범법자들과 싸우며 이능력을 남발하고 시민들을 악의 수렁에서부터 지켜내어 평화를 수호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현실은 언제나 영화만큼 화려하지 못하다. 당장 땀을 뻘뻘 흘리며 건물 1층 정문의 문지방이 닳도록 오가는 아스트라와 키린이 그 증인들이었으니, 건물을 빠져나오는 두 사람의 팔과 어깨에는 꼭 사람 한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스로 인해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줄줄이 엮여나오는가 하는 한편, 검은 연기를 들이마셔서 켈록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어린아이나 누군가의 반려동물도 끊임없이 구출되었다.
   궂은 땀방울은 쉴 새 없이 그들의 앞을 가렸고, 까만 재가 얼룩덜룩하게 묻어 본래의 얼굴 생김새도 묻히는 판국에 화려하고 멋진 영웅? 그런 게 있을 리가. 지독한 현실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키는 이들에게 그런 것을 따질 여유란 남아있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기어이 탄내가 진동하는 건물 내부까지 침범한다.
   허나, 현실이 지독하여 구질구질한 구정물처럼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을지언정 그게 아스트라와 키린이 멈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5층의 다음은 7층, 7층의 다음은 12층, 12층의 다음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지휘센터에서 전달받은 내용을 따라 요구조자들을 업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길 여러 번 반복했다. 여전히 건물의 목재가 타는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찔러댔고, 묵묵하게 수도를 찾아 천을 적셨으나, 그마저도 요구조자들에게 대어주었기에 둘에게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불길 속에서 헤매며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히어로거나, 혼혈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 뻘뻘 흐르는 땀을 훔치고 다시금 사람을 둘러멘 아스트라가 다급하게 창가로 향한다. 물을 뿜어대고 있는 사다리차로 사람을 들어 날랐다. 도중에 구조대원들을 만난 키린은 그들을 위해 검을 들어 퇴로를 확보했으며, 수로를 일부러 부수어 흐르지 못하고 있는 물길을 텄다. 덕분에 중간중간 구조대원들이 숨을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진다. 언뜻 보면 기계에 가까워 보일만치 정석적이고, 무던한 태도였다.


   “키린, 아...래층은 전부 확인... 한 거지?”
   “예, 더 발견되는 생명 반응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한 층만... 더 올라갈까?”
   “체력이 괜찮으시다면.”
   “난 괜찮아... 키린은?”
   “가죠.”


   짧은 대화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한 둘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 층으로 올라갈 채비를 마칠 때쯤, 언제나 사건은 새로이 생겨난다. 현실과 영화를 동일시 두고 싶지 않았지만, 좋은 장면은 죄다 필름을 뚝뚝 끊어버리더니 이럴 때만큼은 그 흔한 클리셰를 피해 가지 못하는 걸 보면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던가. 곧 우르릉,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귀에 꽂은 인이어에서 여러 명의 대화가 교차한다. 염력 특기자들은 당장 좀 더 위로, 힐 특기자들은 곧장 1층에 대기, 내부 구조 대원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대기하며 외부 협력 히어로들은 상황을 확인할 것.
   키린과 아스트라의 무전 통신에도 신호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시간 만에 겨우 성사된 직통 연결에 반가워할 새도 없이 다급하되 진중하게 흘러나오는 처용의 목소리란. 안 그래도 빳빳이 곤두서고 있던 기린과 늑대의 털끝이 긴장감으로 더 날카롭게 벼려져 삐쭉 솟아올랐다.


   [키린, 별아! 듣고 있어?]
   “으응, 무슨... 일이야?”
   “방금 좀 더 위층에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만, 어떻게 된 겁니까.”
   [알렸듯이 전체적으로 건물이 부실 공사입니다. 가스 누출에 관한 건물 설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추가 폭발이 발생한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하필 두 명 정도 위에 더 있어. 위치는... 영화관 직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한 명, 직원 휴게실에 한 명. 근처에 화장실이 있고, 둘의 거리가 멀진 않아. 움직임은 전혀. 정황상 화장실까지 같이 가다가 둘 다 쓰러진 거 같은데, 가스 폭발 원인은 영화관에 있는 매점? 정확히는 모르겠대.]
   [위층으로, 올라가실 수 있겠습니까.]
   “어... 사다리차는?”
   [잠깐만, 무전 답이 안 오는데 귀신한테 물어볼게. 기다려봐.]


   잠시간, 무전기의 밖에서 처용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용이 물었고, 답이 들려오지 않았기에 장담컨대 상대가 절대 롯은 아니었으나, 놀라는 이 하나 없이 조용히 처용을 기다렸다.


   [지금 위층 불 끄는데 집중돼서 지원은 못 해줘. 되겠어?]
   “그럼 다른 히어로 팀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화관의 위치가 애매합니다. 비행이 가능한 팀은 영화관 보다 더 높은 층의 요구조자들은 구하고 있습니다. 낮은 층에 있는 특기자들 중에서 거기까지 닿을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 그렇다는데 키린. 지친 건 알지만... 다음 층이 아니라 더 위층이야. 생각보다 힘들어질 거 같아... 한 번 더, 가능해?”
   “상관없습니다.”


   나도 괜찮고... 키린도 된대. 무전을 통해 짧게 의사를 전달한다. 약간의 한숨 섞인 신음으로 보아, 이미 만만찮게 체력 소모가 되었을 텐데도 ‘생존자가’, ‘존재한다.’ 그 두 단어에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 사람 아니겠는가. 서로가 별반 다름없는 마음가짐임을 확인하곤 짐짓 웃어 보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확고한 답을 뱉었다.


   “그래, 우리가 갈게.”
   [고맙다, 믿는다!]
   [안전에 유의하여 주십시오.]


   이윽고, 무전이 끊어진다. 얼마 가지 않아 전체 무전 채널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확인한 아스트라는 가벼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장 엘리베이터는 확보 불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으며 속도가 느리니 늦을 수밖에 없고, 사다리차는 지원할 수 없는 데다가 애초에 그런 고층까지 올라가는 데에 적합하지 못했다. 롯과 처용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이마저도 고려하지 못한 채 두 사람에게 연락하진 않았을 터, 답은 간단하다.
   생각이라도 연결된 것 마냥, 동시에 걸음을 떼어 혼란스러운 바깥 상황을 훤히 중계 중인 통유리 앞으로 다가선다. 사람은 계속해서 들 것에 실어날라졌고, 누군가는 가족과 친인척을 찾는가 하면, 이미 사망 처리된 사람의 시신을 끌어안고 악을 쓰는 이들이 기어이 그 붉은 시야에 즈려 밟힌다. 언제나 보는 상황이었으나, 언제나 익숙해지지 못했기에, 언제나 마음 한쪽이 심히 쓰렸다. 그래, 누가 히어로를 보며 영화와 같은 삶을 산다고 동경할 수 있겠는가. 히어로에게 남는 것은 이런 것뿐인데. 한동안 말없이 유리를 통통, 두어 번 두드리던 아스트라가 눈을 데록 굴리며 키린에게로 향했다.


   “창문 좀 잘라줄래... 날아서 올라가자.”
   말을 끝으로 키린이 곧장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지금 여기가 8층이니까... 영화관은 15층이던가...”


   확실히 13층까지는 경로가 확보되어 있어 두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으로도 이동이 가능했으나 그 위층은 건물 붕괴로 인해 계단부터가 뚝 끊겨 있는 상태였다. 외부에서 진입하는 것 말고는 내부로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 키린과 아스트라를 찾을 만도 했다. 정확히는 아스트라를. 사람 둘은 충분히 오갈 만큼 깔끔히 잘린 유리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가만히 고도를 가늠하던 아스트라가 키린을 불렀다.


   “층고가 꽤 되는 건물이니까... 키린, 저기가... 아마도 15층인 거 같은데... 저쯤 벽에 던져서 칼 좀 박아줄래... 베어내기로 그 층의 유리도 한 번만 더 깨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정확한 부근을 짚어내자 키린이 똑같이 유리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선글라스 아래의 푸른 동공이 위치를 확보하고, 한 번 더 검의 손잡이로 손을 올린다. 이어지는 검풍이 허공을 가르며 기어이 파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을 가루로 만든다. 불길과 찌는 듯한 태양에 난반사된 유리 조각이 제멋대로 빛을 품으며 저 아래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스냅. 키린의 손끝을 벗어난 짧은 단도가 기어이 건물의 틈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응, 될 거 같아. 너도 내 손 꽉... 잡고... 빠를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단도의 위치를 확인한 아스트라의 시선이 올곧게 단도의 손잡이만을 향한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백발백중의 특기. 타깃을 정확히 설정한 아스트라가 자기 자신을 투사체로 지정했다. 키린에게로 손을 내밀었으며, 키린은 익숙하게 그 손을 부여잡았다. 이내 두둥실 떠오른 두 사람의 신체가 신속히 하늘로 치솟는다. 두 사람이 서 있던 8층은 어느새 타닥타닥 불길이 타들어 가는 발자취만이 남았으며, 그보다 좀 더 위에서는 쿠당탕, 하고 누군가가 불시착하는 소리와 함께 짧은 무전이 연결되었다. 키린입니다. 영화관에 무사히... 안착했습니다.
   이걸 무사히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리를 미리 베어낸 덕에 방화복이 찢기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아래층보다 더 활활 타고 있는 불을 마주한다. 방독면은 요구조자에게 내어준 지 오래였기에 지니고 있던 천으로 빠르게 코와 입을 막았다.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곧장 엘리베이터를 찾아 곁에 있는 안내도를 살펴본다. 요구조자의 위치가 상영관 내부는 아니었기에 그나마 파악하기 쉬웠던가. 건물 구조는 제법 넓었으나 대체로 상영관 좌석으로 사용하여 직원들이 있을 만한 위치는 한정적이었으며, 화장실까지 근처에 있는 직원실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일이 언제나 쉬이 풀릴 리는 없었으니 영화관은 전체적으로 2차 폭발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매점을 포함해서 하나 같이 엉망진창이었기에 오갈 수 있는 길이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아래층보다 더 불이 더 거세게 타오르기 때문에 추가 붕괴가 자잘하게 일어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발걸음 한번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칼은 넣는 게 낫겠습니다. 달궈지면 곤란하니까요.”
   “그럴래...? 그래... 여기서 더 부수면 바닥도 꺼질 거 같긴 해...”
   “동감입니다.”


   지니고 있던 쇠붙이들을 품 안에 갈무리한 두 사람은 방화복의 벨크로를 풀었다가 소맷단을 꽉 조여내며 손목을 가볍게 풀어주었다. 앞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오롯이 체력과의 싸움이었기에 간단한 심호흡으로 준비를 마친다. 부수는 건 곤란해. 압니다. 시야에 비치는 서로의 상태 확인을 마치고 다시 불구덩이 안에 스스로 발을 뻗는다.
   폭발로 인해 깨진 시멘트벽과 그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쇠파이프가 바로 눈앞을 살벌하게 스쳐 지나간다. 천장은 무너져 이대로 밟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정말 그랬다가는 이쪽에서 구조 요청을 해도 모자랄 판이 되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금세 지워내며 거슬리는 잔해를 옆으로 치우는 동시에 퇴로까지 확보한다. 올라오는 건 아스트라의 특기를 이용했다고 한들, 요구조자까지 데리고 그런 험한 방식으로 내려갈 수 없는 노릇이니. 발을 딛으면서 방도를 물색하던 둘은 차라리 끊어진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올라가는 건 어려우나 신체 능력이 보통 일반인의 이상을 넘나드는 두 사람이다. 요구조자를 끌어안고도 반 층 정도 되는 높이를 가뿐히 뛰어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13층까지만 내려간다면 소방대원들의 노력으로 이 이상의 심각한 불길과 연기를 마주할 일은 없었으니 가장 나은 길이라 판단한다.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화강암 바닥 타일에 비쳐 붉게 반사되는 불빛과 달리 빛나는 노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껌뻑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게 화장실에 들어온 비상전력인 듯 했다. 그마저도 곧 사그라질 것 같아 키린과 아스트라는 자신들이 겨우 제때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용의 무전대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직원실이 있었으며 복도의 반대편에는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곤, 곧장 서로 다른 편으로 흩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사람을 부탁할게.”
   “예, 추가 붕괴 위험이 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시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너는... 여차하면, 발도술 정도로 길 막는 잔해 좀 끊어내 줄래...? 마침 비상계단이 엘리베이터 옆이니까, 내려갈 때 편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의 상황에서 화력을 내지 않을뿐더러, 키린에게 있어 검이 총보다 더 높은 파괴력을 지녔다. 장애물을 깔끔하게 치우는 건 '베어내기'인 것이 정답. 바로 등을 돌려 검을 뽑아내는 무감정한 키린의 행동에 오히려 아스트라는 안도했다. 키린을 지켜보던 아스트라 역시도 뒤돌아서 자신이 맡은 요구조자에게로 다가간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으며, 재가 타는 냄새와 영화관의 음식 타는 냄새가 뒤섞여 후각으로도 위치를 구별해내기가 어렵던가. 허나, 태생부터가 늑대의 핏줄을 타고난 아스트라의 벼려진 감각과 가려진 어둠 속에서 시야를 구별해내는 적색의 세로 동공은 검은 연기가 뿜어나오는 와중에도 바라는 것을 반드시 찾도록 한다. 기어이 천장재가 투둑투둑 떨어져 내리는 짧은 복도를 지나쳐 직원실 바로 앞에 쓰러진 요구조자를 발견했다.


   “저기...? ㄱ, 괜찮으신가요...!!”


   정신이 완전히 갔네... 내려갈 때까진 기절 상태겠구나... 이게 낫긴 하지만... 상황만큼은 그리 좋지 않았기에. 요구조자가 기절한 채로 등을 기대고 있는 벽은 폭발과 충격으로 인해 철근이 삐죽빼죽 빠져나와 있었다. 몸이 잘못 눕혀져서 데이거나 박히기라도 하면 그거대로 큰일이었고, 하필 주저앉은 천장은 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린, 거기 잠시만 두고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여기 요구조자 다리가 철근에 깔려있어서... 혼자서는 사람을 옮기기 힘들 거 같아. 출혈도 있고, 철근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연기를 많이 마셨나 봐.”
   [확인했습니다. 이쪽 요구조자를 비상계단에 옮겨두고 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구출할 대상의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시간은 촉박하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지는 때. 비슷한 상황은 수도 없이 겪어봤으며, 그중에서 최악까지 보았던 아스트라로서는 점차 초조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위험을 감수하며 방화복을 벗어 손에 둘둘 만 아스트라가 키린이 지원을 와주기도 전에 철근 사이에 손을 끼었다. 잠시간 이어지는 심호흡. 하나, 둘, 셋... 그와 동시에 일반적인 상식으로 꿈쩍할 리가 없는 철근이 번쩍 들어 올려진다. 예상대로 요구조자의 발은 기괴하게 뒤틀렸으며, 피가 통하지 않아 붉은 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 괴사의 수준까지는 아닌가? 방독면에 가려진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의 상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하필이면 아래서 지휘하고 있을 누군가가 떠오르는 바람에 유난히 더 초조하게 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물만 끼얹고 대책없이 들어온건 아니었으니까.
   여태 손에 들려있는 철근을 천천히, 신중하게 내려놓는다. 이 둘을 마지막으로 아스트라와 키린의 범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니 나머지는 다른 팀에게 맡겨도 될 터였다. 본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의 아스트라였다면 결코 안주하고 있지 않았을 테지만, 살짝 긴장이 풀리는 건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구조자를 무사히 확보했다는 안도감이었을 지도,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지도, 그도 아니라면 그럼에도 다시금 화재 현장에 뛰어드는 멍청한 자식 때문이었을 지도. 요컨대,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아스트라가 방심했다는 의미였다.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는데 반 박자 정도 늦을 만큼.


   “아스트라!”


   키린의 외침과 함께 아스트라가 다급히 요구조자를 감싸 안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이내 덜컹하고 철제 구조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바닥이 꺼질 거 같다는 착각이 쏟아진다.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화염에 젖은 고통이 등의 곡선을 타고 잔잔히 퍼진다. 대비하지 못한 충격을 겪는 것도 오랜만인지라 잇새로 신음을 뱉는 법도 잠시간 잊었다. 부딪혀서 일어난 통증은 참을 수 있다. 다만, 하필 떨어진 게 달궈진 철근인지라 등판이 끊임없이 화끈거려 눈물이 찔끔 날 것도 같았다. 개 같은 자식들... 건물을 이따위로 지어...? 실상 아스트라였기에 기절도 겨우 면한 수준이었겠다만.


   “요구조자는 내가 감싸서 막았어... 괜찮아.”
   “그쪽만이 문제는 아닙니다만.”
   “나도 괜찮아. 아마도.”
   “괜찮다는 말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약간, 스친건데도...”
   “거짓말이 서툴군요.”
   “... ...응...”


   아스트라는 바로 달려온 키린에게 부축되어 몸을 일으켰다. 변화없는 표정에서 못마땅함을 읽어낸 아스트라가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에 따른 한숨은 덤이었고.


   “데려갈 수 있으시겠습니까?”
   “등에, 업는 건 조금 무리.”
   “이쪽으로 넘겨주시죠.”
   “괜찮...겠어?”
   “당장 아스트라가 업는 것 보다야 그 편이 훨씬 괜찮습니다.”
   “...응.”


   키린이 그럴 성격도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어쩐지 핀잔을 들은 듯하여 결국 무어라 더 첨언하는 것은 포기한다. 정말 이 정도는 버틸만한데... 구시렁구시렁하는 아스트라를 가벼이 무시한 키린은 요구조자의 상태를 살펴보며 철근과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쓰러져있는 요구조자를 제 어깨에 둘러멨다. 기어이 방화복을 벗고 있는 아스트라와 나뒹굴고 있는 두 개의 철근,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상대의 다리로 상황을 간단히 유추한 키린의 나지막한 한숨이 한 번 더 이어진다.


   “내려갈 길은 확보해두었습니다. 등이 부러지진 않았습니까?”
   “그... 정도는 아닐걸...? 따갑, 긴 한데 부러진 기분은 아냐. 당장 상황이 이래서 못 느끼는 걸지도 모르고...”
   “... ...”
   “미, 미안.”
   “제게 사과하실 일은 아닐 텐데요 또한 당신을 혼내게 될 사람도 저는 아닙니다.”
   “니케겠지...”
   “알면 됐습니다. 이만 가죠. 여기도 곧 무너질 겁니다.”


   절뚝거리며 키린을 따라간 곳에는 예상한 바와 같이 비상계단이 있었다. 워낙 건물이 전체적으로 부실 공사 인지라 계단에도 연기가 흘러나오면 어쩌나 싶었으나 다행히 방독면을 벗어도 괜찮을 만큼 차라리 공기가 훨씬 쾌적했다. 이전에 키린과 아스트라가 여러 번 오가며 13층까지의 비상계단 창문을 모두 열어둔 덕이었다.
   요구조자를 둘이나 양팔에 감싸 안은 키린이 반쯤 무너진 계단을 넘어 아래층으로 내려갔으며, 끊이지 않고 아스트라가 곧잘 따라오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한다. 등은 여전히 따갑고, 아팠기에 약간의 짜증이 일 것 같았으나, 그런 키린과 눈이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짧은 미소로 화답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자꾸만 미소가 비실비실 비집고 나와 결국에는 멍청한 표정으로 마주해주는 꼴이 되었다. 그치만, 그치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언젠가의 아스트라가 뛰어들었던 불구덩이에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처용과 울먹거리는 아스트라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귓가에 맴도는 처용과 롯의 목소리를 상기했고, 1층에서 빠르게 환자들을 보고 있을 어느 약사를 떠올린다. 아스트라의 앞을 묵묵히 이끌어주는 동료도 생겼고, 요구조자들의 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 그러니 임무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긴장을 풀고 안도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에 불길은 거의 사그라들었고 폭발 가능성 역시 줄어들었다. 걱정은 붕괴라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투입된 효과는 확실했는지 요구조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며 구조되는 인원의 수는 부쩍 늘어 현재 구조 작업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휘소에서 생존자 위치 안내와 팀별 지시를 이어 나가던 롯과 처용은 다시금 지휘권을 소방서 측에 넘기고 현장 측으로 합세한 지도 꽤 지났던가. 서로 반대편을 살피고 오던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그쪽은 생존자 더 발견했습니까?”
   “이쪽은 이제 다 찾은 거 같아. 그쪽은 어땠어?”
   “전부 의료반으로 이송했습니다. 구조팀도 대부분 그곳 일손 도우러 빠졌고요.”


   귀신들에게도 확인해보자니, 살아있는 사람은 이제 전부 구출한 듯했다. 아마 이제 저 콘크리트 더미 아래 묻힌 것은 누군가의 시신이겠지. 산 사람을 전부 살리고 나면 이후에는 시신을 수습하는 쪽으로 마무리 작업이 들어갈 것이다. 다만, 아직 걸리는 점이 있다면…….


   “…테러범을 찾았다는 소식은 없었습니까?”
   “없었지. 죽었는데 귀신을 놓쳤나? 아니, 그런 기운을 눈치 못 챌 리가….”
   “그럼 아직 저 어딘가에?”


   쏟아지는 비 사이로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산 사람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회색빛 풍경. 혹시 이미 빠져나간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정신 사나운 상황이었고, 다들 누구 얼굴 하나 확인할 겨를도 없이 뛰어다니기 바빴으니까. 두 사람이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노라면 빗소리만이 짧은 정적을 메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훑자. 뭔가 좀 느낌이….”
   “꼼꼼해서 나쁠 건 없으니 그러죠.”


   처용은 비에 젖어 쓸모없게 된 부적들을 뜯어내며 길을 걸었다. 정확히는 이미 빗물 덕에 반쯤 찢어지고 글씨가 번져서 오래전부터 제 기능을 하지 않던 것을 이제야 숨 돌릴 틈이 나서 버린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테러범도 알았을까요? 그러던 와중 들려오는 롯의 목소리에 처용은 고개를 돌린다.


   “뭘?”
   “건물의 결함 말입니다.”
   “알았다면 건물 내부에서 특기를 썼을까…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썼을 거 같은데. 탈옥할 정도의 인물이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게 폭사… 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거든.”
   “그렇죠. 예상치 못하게 건물이 빠르게 무너진 탓에 그에 파묻혔다면, 목격했던 정보의 위치에서 크게 벗어난 곳에는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허나 그곳은 이미 다른 팀이 수색한 지 오래였고, 마침 그 장소 언저리를 지나치는 찰나였다. 둘은 아주 잠시간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로의 의사는 묻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에 물이 들어가 걸을 때마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울리고, 다시금 가설이 담긴 대화가 이어진다.


   “구조팀의 수색에 실수가 있지는 않았을 거고요. 현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들만 모여있을 테니.”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뭐 그런 거? 지하까지 무너져내린 건가?”
   “도면상으로 지하는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도면상으로는. 다시 한번 읊는 문장에는 무게가 실려있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것인지 처용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라이트를 켰다. 하나만 하는 놈은 없다더니만, 부실 공사에 불법 개조까지……. 건축법이 있으면 뭐 합니까. 이렇게 단속이 안 되어서야 원. 약간은 한탄이 섞인 듯한 말들이 오가며 형체만 남은 건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두 개의 라이트가 이곳저곳을 맴돌다가 한곳에 고정된다. 잔해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손으로, 발로 치워내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쌓여있던 잔해가 뒤로 훅 넘어가 버렸던가. 툭, 툭,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도면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 원래는 없어야 할 아래로 향하는 계단, 그 끝에 찌그러진 철문….


   “그만한 불길 속에서 이걸 찾을 순 없었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때는 도면에 의존할 수밖에 없… 아, 안에 사람 있다.”


   그 사이에 혼이 내부를 들여다보고 온 것인지 처용은 제 말을 끊고 덧붙인다. 부러 그 사람이 테러범이라는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 두 사람은 빠르지만 조심히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철문 앞에 섰다. 처용은 바로 문을 여는 것 대신 이음새에 부적을 몇 장 붙이고 뒤로 물러나 롯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무너지진 않을 거 같아. 대신 그래도 조심해.”
   “예, 의료반에 미리 무전 부탁드립니다.”
   “확인.”


   롯은 찌그러져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의 손잡이를 쥐고 힘을 주어 밀어보고는 자세를 고쳤다. 단순히 힘으로 열기보다는… 찌그러져 틈이 생긴 문의 밑바닥에 구두 끝을 끼워 넣고 살짝 들어 올리며 다시금 힘을 주어 문을 밀어낸다. 그러자 끼긱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얼마 안 가 덜컹, 하며 완전히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보인 풍경은 간단했다. 천장-그러니까 1층의 바닥-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그 위층의 천장까지 무너진 건지 무너진 곳을 메울 정도로 잔해더미가 쌓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던 테러범으로 보이는 인간이 깔려있었다. 솔직히 말해 숨이 붙어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뭐, 저 상태라면 아무리 치료를 잘 받아도 두 번 다시 걷는 건 힘들 테니 또 탈옥을 한다던가, 이런 사고를 만들어내는 일은 없으려나. 짤막한 생각이 그렇게 지나간다.


   “의료반에서 이리로 오기로 했어.”
   “아, 예. 당장 치우면 위험하겠죠?”
   “아마도… 당장 저 아래 다리가 제대로 붙어있는 것도 확인할 수가 없어서.”


   우선 진통제랑 안정제부터… 처용은 챙겨온 케이스에서 주사기를 꺼내 약을 집어넣으며 테러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와중에도 의식은 잃은 상태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다면 무슨 말을 내뱉을지도 모르겠고, 이번만큼은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혈관을 짚으려던 손이 잡생각으로 인해 떨린다. 
   이놈을 살리게?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죽은 거지! 죽여! 그냥 죽게 놔둬! 이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죽은 자들의 말이 귀에 박혔다. 아, 골 울려. 인상을 찡그리고 주사를 놓을 자리를 찾아가던 손이 다시금 멈췄다. 잘못 놓으면 안 되는데, 집중이 안 된다. 그러다 불쑥 시야에 다른 이의 손이 끼어들었다.


   “처용, 주사 주세요. 내가 하지. 기본적인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부탁할게.”


   처용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롯에게 주사기를 넘겨주었다. 귀신들이 살리지 말라 방해하덥니까? 허… 그게 보여? 그런 건 당신 얼굴 보면 압니다. 이따 니케 오면 그런 건 말하지 마. 그건 선생님도 당신 얼굴 보면 알 텐데, 예, 일단 알겠습니다. 어쩐지 불만이 있는 표정으로 롯을 바라보는 처용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능숙하게 주사를 놓으며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서를 켜두고 나왔던가. 마지막 문장을 다 처넣기 전, 엔터를 한 번 치고서 그 자린 비워뒀던 것 같은데. 마음을 읽는 특기자가 있더라면, 이 순간의 마음을 비난했을 것이다. 한차례 해일이 가신 직후라 하더라도, 그들의 일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사실 롯에게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분야는 지금 막 시작된 것에 가까웠다. 용의자의 확보, 현장의 경위 정리. 건물의 부실성, 사상자의 명단 확보, 또 그 과정에서 어긋나거나 시답잖은 트집 잡힐… 요컨대 법률 고문, 지휘팀으로서 할 법한 모든 일들. 그러니 앞서가는 히어로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씹어 보는 것은 눈먼 여유거나, 징그러운 냉혈한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롯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그는 현장의 완전한 타자 他者는 아니었으나, 애매하게 허리를 반쯤 걸친 위치였으니까. 히어로의 명찰을 달았기에 함께했다. 다만 제 손으로 철근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튀는 파편이 뺨을 긁어도 무너지는 벽을 견디지도, 터지는 피를 막기 위해 열린 가슴을 잡고 힘을 쏟아붓지도, 수백 원망에 어린 망자의 소리를 들으며 잔해 사이를 뛰지도 않았다. 무너진 건물 틈에서 빠져나온 이들의 시야에 그는 없다. 새로 생을 부여받은 듯한 착각은 그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를 펴고, 무전기를 켜고. 몇 마디 말과 머릿속을 핑핑 돌아간 계산으로 그들을 어딘가로 옮긴다. 내가 그르치지 않았다는 오만으로 점철되어야만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울고 무너지고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감정에 전이되지 않아야만. 무엇도 하지 않은 채로. 현장에 완벽하게 스민 빗물은 되지 않도록.


   “우산 있어, 롯?”
   “우산말입니까?”
   “너 서류가방에.”


   그거 만능 가방이잖아. 앞서가던 처용이 가방을 가리키며 말한다. 비도 그쳤는데, 왜. 아직 하늘이 구질구질한 게 새벽엔 다시-... 아스트라 씨, 자꾸 처용한테 말리니까 싸우잖아요. 오가는 말들에 느리게 답하려다, 수화기의 소리가 앞서 터진다. 먼지 낀 화면에 수신 메시지가 뜬다. 누르려다, 끊긴 말이 무안할까 봐 고개를 들거든 눈이 마주친다.
   받으시죠.
   키린의 고개가 짧게 까닥인다. 소리 없는 대답이 지나면 두 개의 시선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각자의 말들이 떨어진다. 비 소식은 더 없었습니다. 롯입니다, 말하세요.


    [교수님, 어디 계십니까?]
   [방금 건물서 나왔습니다. G 교도소 탈옥범, 테러 용의자 확보 되었네요. 의식 불명으로 이송중이니 D병원에 인원 보내둬요. 나도 그리로 가죠.] 
   [바로요? 방금 나오셨다면서요. 교수님은 이만 퇴근하셔도… 저희가 처리하고 올리겠습니다.]

 

   다 걸러지지 않은 상대편의 소음이 담긴다. 분주한 사무팀들이 외치는 소리나, 슬슬 쏟아지기 시작하는 서류들을 들고 뛰는 직원들의 소리. 어째 이 인원은 증원을 해도 해도 모자란 지. 인력난은 어느 부서나 마찬가지지만.
   한탄엔 소리가 없었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부정의 골을 파봐야, 사회와 인간 구성의 도덕을 처음부터 다시 쓰지 않는 이상 불가피한 문제다. 고작해야 인력 문제임에도, 정의적이라는 틀은 늘 문제를 깊게 만들었다. 충돌은 늘 존재했고,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들이란 하나같이 연약해서 너무 쉽게 위험에 처했으니까. 그것을 도울 손들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으니까. 인간이 만든 규정과 화폐, 능력 따위를 아무리 쏟아부어도 생명 부지를 재단하는 것은 불가했으므로.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생명 부지는 결국 1%의 운으로 가름되고. 인간은 그 주변을 돌며 떨어진 잔해를 붙들거나 치우는 것이다. 걸림돌이 생기지 않도록. 그 유치한 퍼센티지가 증가하도록.
   


   [건물의 도면에는 말입니다.]
   [도면이요?]
   [지하가 없더군. 나는 방금 지하에서 나왔는데.]
   [....]
   [가야 할 것 같죠?]
   [넵.]
   [건설사, 경찰쪽에 연락 취해주십시오.]


   몇 마디 대답이 이어지고서 전화는 끊긴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걸었다.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만큼 작성될 문서들의 수를 가늠하며. 조금 전 처용이 들은 수십 개의 죽어버린 목소리의 주인과 그만큼 발송될 부고장을 세고. 현장에 도달하기 위해 키린이 스쳐온 몇 개의 코너와 몇 대의 차 중 몇 가지의 항의가 터져 나올지 따위를. 범죄자의 이력에 추가될 문장의 수와 그만큼 늘어날 페이지의 수를. 당신의 삶과 그들의 삶에 기록될 죽고 살린 사람의 얼굴들을. 결국 생각은 다시 문서에 메인다. 쳐내려 갈 활자의 수마저 가늠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무작위로 두드린 계산기처럼, 숫자들이 규칙성 없이 나열된다. 비 그친 땅은 여전히 눅눅했고 젖은 도로를 달리는 사이렌은 멀어졌으며, 다 가시지 않은 구름은 물을 쏟으며 저편으로 밀려가고 있다. 일순 생각이 몰아친다. 너무 많은 문장이 빡빡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무언가 전이되고 있었다. 틈을 벌려야 했다. 문장과 문장을 잡아채, 억지로 사이를 떨어뜨려야, 엔터키를 두드려야. 틈을 벌려야 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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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띄워지는 말들 사이에서 숨을 쉬도록.
   타각. 짧은 자판음이 들린다. 한 줄을 비우고 내려온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공백에 숨을 쉰다. 잠시 누르던 눈두덩에서 손을 떼고 보면, 멀뚱한 얼굴 하나가 일상적인 얼굴을 하고 이쪽을 바라본다. 


   “너도 갈 거야?”
   “어딜 말입니까?”
   “치료부터 받으러 가셔야지, 어디가세요?”
   “뭐? 왜? 나 멀쩡한데. 정리도 되는 중이겠다 이제 수고주 한 잔 하러…”
   “그럼 팔에 그건 처용씨 와인이고요? 빨갛네요.”
   “아?”
   “다치셨습니다, 처용.”
   “처용... 병원 안 가고 술마시러 가면 내가 직접 구급차가 되어 줄 수도 있어...”
   “아스트라씨도 병원으로 가셔야해요.”
   “나는 괜찮…”
   “안 괜찮아요.”


   니케가 샐쭉하게 날 선 시선을 던진다. 아스트라의 쩔쩔매는 얼굴이나 능청을 떠는 처용의 얼굴. 묵묵하게 떨어지는 키린의 말들. 그들의 뒤로 달려가는 기자들의 구두가 보인다. 아이를 끌어안는 부모의 얼굴과 참던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의 얼굴이, 수군거림을 몰고 각자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구름이 다 밀려가 건조한 바람이 분다. 땅에 붙은 물기가 손 위로 들러붙는다. 마음을 읽는 특기자가 있더라면, 이 순간의 마음을 비난했을 것이다. 한차례 호흡 통이 가신 직후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겐 이것이 일의 시작일 것이므로. 끊겨가는 숨을 붙이기 위해 팩을 들고 뛰는 의료진. 밀린 사람들을 뚫고 달려가는 경찰들. 어떤 부고와 만들어져야 할 화관들과 이별해야 하는 사람들. 작성되어야 할, 수십 개의 문서. 무엇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사회와 인간 구성의 도덕은 새로 쓰이지 않는다. 유치한 퍼센티지를 증가시키기 위한 발악은 어느 곳에서든 이어지고 있으며, 롯은 여전히 반쪽짜리 타자 他者였다.
   다만, 앞선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애 아빠가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다치셨다면서요, 감사합니다…. 아스트라의 손을 쥔 누군가가 말한다. 그 품에 안긴 아이가 말똥한 눈을 굴린다. 상처 난 다른 손이 머리를 쓸고 지나간다. 소란은 저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 누군가가 말한다. 떨어진 거리를 달려,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이제 한숨 놓았어요.
   이제 숨을 쉬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숨을 쉬어요….

*

   그러니까. 문서는 여전히 미완이고 어떤 삶들은 끊어졌으며 사람은 여전히 충돌하고 사회는 여전히 1%의 운으로 살고 죽어가며 누군가의 비난이 이어지더라도. 이것의 서술자는 나였으므로. 그들 사이에 나를 넣고, 감히 우리라는 말로 바꾸어 씁니다. 
   
   지금, 
   
   우리가 틈을 벌렸습니다.
   
   이제 숨을 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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