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isces Record
드디어 막장을 채울 수 있다. 이는 ‘솔’이 아닌 ‘케이시 솔 모티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친 한 권의 이야기다.
이 결말에 네가 있어 기꺼워. 네가 아니었다면 영영 빈 낱장으로 남았을 거야. 누구도 ‘케이시’에게 글을 쓸 자격을 주지 않았으니까. 나의 리즈, 이제 널 만나볼 수 없겠지만, 어쩐지 지금도 나의 마르지 않은 잉크를 선홍빛 시선으로 쓸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오랫동안 떠오르지 않던 그의 필체가 양피지 위에 적혔을 때, 누군가 내게 지독한 장난을 걸고 있다고 강하게 의심했다. 추억이 아닌 미래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나는 당장 내일도 책장의 수북한 먼지를 털어야 했다. 가끔 손님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단지 세월만을 구실로 망가지는 책들을 보며 그게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미래라고 생각했다. 읽히지 않는 활자는 빛이 바랬다. 그러나 손때보다는 뭉게 핀 먼지가 낫다고 홀로 위안 삼았다.
지저귀는 만남의 창구가 유별나게 친애에 가까워 리즈를 불신하길 거듭했다. 너와 그곳에서의 7년을 미련없는 척 버려두고는 정작 비굴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도 몰랐다. 야망을 손수 꺾은 케이시 솔 모티머를 누구보다 가장 미워했으니까, 나는.
하지만, 만남을 승낙했다. 한시도 샤르트뢰즈를 잊지 못해서. 이미 불(아니, 무.)명예한 한낱 극작가보다 한 개인의 소망이 무게를 더해서. 이 시시한 미련을 나는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을 입에 담는 자들은 시시하고, 그것을 위대하게 포장하는 건 나의 역할이었다. 덕분에 널 만날 그럴듯할 빌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바다를 앞두고 마주한 리즈는 노을의 잔상을 한껏 받고 있었다. 날 보곤 환히 웃자 한동안 천치처럼 머리가 둔해져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는지. 당장 분류 모자를 뒤집어쓰고 살라자르에게 묻고 싶었다. 고작 누군가의 미소도 삶의 야망이 될 수 있나요. 박동은 내가 알지 못하는 속도로 세차게 뛰어서 문득 호그와트 한복판에 던져졌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나는 생애의 극을 들어주는 리즈가 있어서 살고 싶었다. 내 삶의 중앙에 앉은 유일한 관객이 막을 올리는 동인이었다. 휘날리는 모래에 눈앞이 뿌옇고 눈은 따가워지자 다급하게 안경을 벗었다. 흐린 시야 사이로도 꾸준하게 리즈를 보았고, 보았다.
손에 들린 안경을 한 번, 목 바로 위까지 친 머리칼을 한 번. 눈을 굴리던 리즈의 입꼬리 찰나 굳었을 때 비로소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그 애를 그렇게 웃도록 만들지 못했다. 몇 년의 세월을 미화된 추억에 발목 잡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리즈가 나와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조차…….) 그러니까, 그가 아는 케이시 솔 모티머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모든 충동과 짙은 치욕을 접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나를 리즈가 붙잡았다. 날숨에 바람이 기도를 막았다. 여름의 습기를 머금어서 유독 난폭했다. 짠내가 목구멍에 따갑게 달라붙었다. 리즈와 물살을 따라 걷고 이내 잔잔한 파도와 화해할 때까지 계속 숨을 멎었다. 어지럼증에 무력해진 현재가 청사진이 되었다. 아마,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얽어오는 리즈. 차마 너를 원망할 수가 없어서 열기 탓으로 돌려버렸다. 어째서 너는 여름보다 뜨거운 한봄인 걸까.
까마득하고 우연한 데이트는 추억으로 두기에는 지난하고 잔혹하지. 앤, 어쩌면 난 그들을 덜 사랑하는 게 맞았을지도 몰라. 네가 무슨 용기로 그곳을 떠났는지, 두 번을 살았다는 네 동생이 어떤 심경으로 불효했는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무대를 가진 네가, 리즈와 동반하는 그가, (난 야망을 동경하지만) 야망을 좇는 당신들이 거북해.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리즈. 난, 다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야.
리즈가 그때의 보답이라며 그려준 그림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나는 꿈과 같게 우리의 한때를 되새기고 있을 것이다. 리즈가 말하길, ‘그’ 케이시가 이와 같은 해변에 선 샤르트뢰즈를 그려주었다고 했다. 내가 인물화에 크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다. 아마 우스웠을 텐데…. 확인차 물으니 과연 해변은 그럴 듯 했으나 리즈는 깨나 엉망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럼에도 샤르트뢰즈를 그린 데에는 그만한 욕구의 발현이었을 것이라고 대신 답해줬다. (당장 내게도 펜과 종이가 주어진다면 샤르트뢰즈의 미소를 수백 장 그려냈을 것이다. 기억 속에만 박제하기는 하등 모자라니까. 참지 못한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나와 가치가 매겨진다. 그 치환의 산물을 창작이라고 표현했다.)
행하지 않은 일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돌려받았다. 그게 얼마나 기묘하고 감사한 일인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뻔뻔했다면 기껍게 그것을 받아보고 웃었겠지만, 연민의 껍데기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갈망이 날 태웠다. 그림을 품에 안고 리즈에게 소리쳤다. 목에 가시가 텁텁하게 박힌 느낌이었다. 내가 걔처럼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아침을 떠나, 다른 내일로 향할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의 허락을 구할 일은 아니었다. 만약 가능했더라면 진즉 그리했겠지. 그런데 꼭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너여야만 할 것처럼. 아직도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리즈의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야, 얼굴을 쳐다보기가 버거웠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끝내 종말을 감내하는 태양을 수평선 너머로 작고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경종에 불안을 삼켰다. 한심하게도 나는, 또 그 상실감을 참지 못하고. 리즈의 이름을 부르면 리즈가 돌아보는 현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왜냐하면, 줄곧 네가 없기에 마지못해 외로워서. 있지, 리즈…….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럼 너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지.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나는 행복한 케이시 솔 모티머에 무지했다. 무지한 사람은 교만하게 굴 수 있었다. 추위에 상한 야망은 겨울이 지나서 움텄다. 만약, 내가 ‘솔’을 내치고 나의 극을 되찾는다면, 그게 행복이라면. 지금의 나는 불행할지도 몰랐다. 이름을 잃어서, 모의 아침에 묵어서, 모티머라서, 내 세계의 샤르트뢰즈를 몰라서.
고마워, 리즈. 이곳의 나도 여전히 케이시 솔 모티머라고 말해줘서.
P.S
추신에 사랑을 덧붙이는 건 역시 진부할까?
어느 시간선이든 나는 항상 너를 사랑해. 우리는 여전할 거야.
* @ddeok_CM님 지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