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의 : 부재관측
#S.1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장면을 뜻한다.
몰려든 인파가 이미 저택을 에워싸고 있었다. 호기심에 까치발을 들거나 폴짝 뛰어서라도 담장 너머를 기웃거린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하거나 구역질했다.
혼비백산 달려온 경찰이 호루라기를 삑삑 불고 나서야 바글대는 덩어리 같던 구경꾼 무리가 흐무러졌다. 굼뜨게 비켜주는 군중의 틈바구니로 나서는 경감은 난색과 사색의 중간쯤 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발을 직직 끌며 다가가자 다 죽어가는 얼굴로 대문을 지키고 서던 하인들이 반색하며 말도 없이 몸부터 비켰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부른 경찰이 당도할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으나, 난들 알겠냐며 아이처럼 울고 싶기로는 경감 또한 마찬가지다.
사건은 마당에서 벌어졌다. 오래 찾을 것도 없이, 대문을 넘어 고택 현관 초입까지의 어른의 벌린 양팔과 비슷한 폭인 하얗고 곧은 길. 반듯하게 짜 맞춘 대리석 바닥.
그 위에 시체가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하나. 시체에겐 머리가 없었다.
대신 대량의 피와 그 밖의 다른 것들 - 아마 두개골의 안쪽에 있던 것들이 마구잡이로 널려 하얀 바닥을 지저분히 더럽혔다. 유월을 맞아 덤불에 핀 장미 향으로 뒤덮였을 정원이 깨끗하지 못한 피 냄새로 잠식됐다. 참상의 낌새를 맡은 벌레들이 기고 날아 시체 주변을 기웃거렸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경감도 구역질이 치밀어 코를 틀어쥐었다. 그는 꿀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지금쯤 구경꾼을 돌려보내느라 바쁠 막내 경관을 현장에 들이기 전에 주의를 줘야겠다고 판단했다.
둘. 시체의 신원은 확실했다.
한발 늦게 따라 들어와 마음을 정말 단단히 먹고도 웩 헛구역질하던 신참이 파리하게 혼잣말했다. 믿을 수가 없네. 이 선생이 저렇게. 그 망나니가.
바로 그 이 선생. 온갖 금싸라기 땅을 팔도에 다 가졌으며 가까운 시가지만 해도 올린 건물이 양손을 넘는 알부자. 자고로 부패한 인사 중에 그의 성의를 받지 않은 자가 없고, 한 줌 청렴한 인사 중에서도 그의 호의를 겪지 않은 자가 없다.
돈이 만든 유착과, 유착에서 비롯한 오만함과, 오만함에서 나온 행패로 이루어진 이 선생의 악명이란 퍽 대단했다. 이 선생을 선생이라 공대하는 누구도 이 씨를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았다.
광장 신작로 한복판에서 노름판을 벌이든 굿판을 벌이든, 감히 말릴 엄두가 안 날 작자였는데.
#S.1A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셋. 용의자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의 아들이었다.
코를 막은 맹맹한 목소리로는 근엄할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경감은 콧기름 묻어난 손을 뒤로 감추며 말을 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이현견 씨? 맞으시지요?”
이 선생의 유일무이 독자, 이현견은 그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비명 지르거나 통곡하거나 변명하지도, 놀라 달아나거나 픽 기절하지도 않았다. 오직 아비의 참혹한 시신을 내려다보며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제 이름이 불리자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마주하니 경감은 이평갑 선생이 생전에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머리통에 달렸던 것과 똑 닮은, 벌건 눈이 자신을 향해 도르륵 굴러오자 등줄기가 괜히 섬뜩해졌다. 어떤 적의도 없이 넋 나간 시선인데도 그랬다.
질문하고 고지하는 동안 이현견은 듣는 둥 마는 둥 잇따라 시체만 쳐다보았다. 잠깐씩 다른 데를 봤다가도,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라질까 무섭다는 것처럼 자꾸만 확인해댔다. 어느 순간엔가 그의 입술이 굳은 일자로 다물렸다. 그러나 내내 아무 말도 않던 그에게 일어난 미세한 변화를 이런 난장 속에서 눈치챈 이는 없었다.
결국 경찰이 눈치를 살피며 용의자를 포박하고 왁자지껄한 관중을 밀어내며 이송할 때까지, 머리 없는 시체의 아들은 끝끝내 침묵을 지켰다.
그가 뱉은 첫 마디는,
“변호사를 불러주시오.”
였다.
#S.2A 방 안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네가 그랬어?”
“어렵지 않을걸. 형은 그저 변호사가 으레 하는 말을 하면 될 뿐이야. 피고는 무고합니다. 무엇도 피고의 죄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흠, 이게 맞는진 잘 모르겠군. 어쨌거나.”
“네가 죽였어?”
“충격으로 넋을 잃고 있었다 해서 그를 범인으로 몰아서 재판에 세우다니? 금수도 천륜을 알기 마련이오만, 부친을 터무니없이 잃고 나선 천인공노할 살인마로 몰리다니? 이 어찌 잔악한 처사가 아니겠냐고.”
“…….”
“피고는 피해자의 유일한 가족이었소.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하거늘. 하물며 흉기는커녕 정황조차 불분명한데. 애당초 살인사건이 맞긴 하단 말입니까!”
“적휘, 네가 죽였냐 물었어.”
양손을 들어 올리며 격양된 연극 조로 외쳤던 이현견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손목의 수갑이 잘그락댔다.
쩔쩔매던 경관들이 제대로 된 구금을 포기하고 유치장 삼아 내어준 방 안엔 감시인조차 없이 두 사람뿐이었다. 한정호는 몰실한 수갑을 지친 눈으로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네가 이평갑을 죽였어?”
“아니라 한다면?”
“솔직히 말해. 난 네 변호사다.”
“아버지의 변호사지.”
채근당한 이현견이 낄낄거렸다. 어깨가 들썩이자 수갑이 연신 금속음을 냈다. 죽은 고용주의 살해 용의자를 앞에 둔 변호사는 웃지 못했다.
“장난칠 기분 아니야…! 네가 그동안 치던 사고 수준이 아니라고. 지금 바깥이 무슨 난리가 난 줄 알아? 저택에 몰려온 사람을 줄 세우면 한강을 건널 거다!”
한정호는 책무를 다하는 중이었다. 기웃거리던 기자를 쫓아내거나 없던 권리를 주장하는 친인척을 돌려보내느라 직전까지도 정신없이 바빴다.
그의 노고를 잘 아는 게 분명한 후계자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편히 앉아 빈정거렸다.
“그럼 뭐 울기라도 할까. 부친상도 못 치르고 끌려왔다며 대성통곡이라도 해? 기자들이 좋아하겠군.”
“적휘!”
서로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맞부딪혔다. 시선에 담긴 불신이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 위를 스멀스멀 기었다. 한정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더 여유 없는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더러 널 변호하라고?”
체념에 가까운 신중한 질문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날 선 공기를 흩어두었다. 이현견이 조롱하는 기색을 지우고 산뜻하게 긍정했다.
“그래, 한 변호사. 내 무고를 증명해.”
그는 이현견의 얼굴을 망연히 보았다. 아비를 닮은 얼굴을, 아비마저 잡아먹을 관상이라던 얼굴을 보았다. 오만하게 올라간 입술은 상대방의 거절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더한 요구나 담화도 없었다.
아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대화하던 자리, 이현견은 파고듦을 허락하지 않고 경계하는 저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몰이해. 단절. 깊이를 모르게 뒤틀린 그를 옛적부터 알았다. 삼 척도 안 되는 너비의 탁자가 오늘따라 멀었다.
#S.2B 방 안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그러니까.”
경관이 펜대의 끝으로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 시각에 사무실에 혼자 계셨다는 거지요? 종로에 있는.”
“예.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향했고요.”
한정호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의례적인 절차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질문이 집요했다. 딱딱한 의자가 여간 불편하지 않아 연신 자세를 고쳐 앉아야 했다.
대뜸 불러세워 취조실에 앉혀두고 질문을 던지던 이는 콧잔등을 실룩거리다가,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전구의 누리끼리한 빛이 그의 의심스러운 표정을 비추었다.
“그냥 지금 올바로 털어놓으십쇼. 목격자가 있습니다.”
“…예?"
“피해자 댁에서 급하게 나오던 선생님을 본 사람이 있다고요.”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입니다, 세 명.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놓는 으름장이 황당할 뿐이다. 청천벽력에 충격이 먼저 달려오고 이해와 반응은 나중이었다. 그는 말문이 막힌 입을 뻐끔거리다가 급하게 되물었다.
“잠시, 잠시만…! 목격자라니. 저를요? 절 이현견의 가택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시간에?”
“예에.”
“말도 안 됩니다!”
억울한 목소리가 치솟았으나, 상대방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불신을 누그러뜨리지도 않았다. 대놓고 자백을 종용하면서도 당당한 태도에 하나는 확신했다. 허언으로 목격자를 운운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즉 정말 자신을 본 이들이 있고, 수사관은 이미 저를 혐의자로 낙점한 게 틀림없었다. 젊은 변호사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는 애써 혼란과 흥분을 가라앉히고 재차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거길 혼자 쓰긴 해도, 상주하는 경비원이 계시니 증언해주실 겁니다.”
“경비원? 건물 경비입니까?”
“건물 일 층에 계십니다. 제 사무실은 이 층이라, 오갈 때마다 꼭 인사를 드리고요.”
뚜렷한 어조로 대답하는 동안 재워뒀던 두통이 도졌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통증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정호는 안경을 젖혀 올리곤 피로한 눈두덩이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찌푸려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태도에 도리어 불퉁하던 경관의 입가가 언짢게 삐죽였다. 정호는 내심 안도했다. 아예 안 들어주진 않는군.
잠깐의 불편한 침묵이 지나갔다. 여전히 께름칙한 낯빛의 경관은 헛기침하며 한 발 물러났다.
“사람을 보내서 여쭙긴 할 겁니다.”
“예. 그러십시오.”
#S.2C 방 안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그럼 선생께선 사건과 무관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애석할 일은 아닙니다만… 상황이 이리되었군요.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차분하게 답하는 사이에도 한정호는 계속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긋지긋한 두통은 한 번 몰아치기 시작하면 쉽게 가시질 않는다. 사라지긴커녕 점점 세를 불리더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져 왔다.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상대가 물어왔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가벼운 두통입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약을 좀 드릴까요?”
“아뇨, 아뇨…. 실례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세요.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무의미한 대화가 급히 마무리 지어졌다. 두 사람은 예의 바른 인사를 나눴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정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공연한 걱정 혹은 의심을 사지 않을 속도로 방을 나섰다. 등 뒤로 방문이 닫혔다.
안경을 고쳐 써봐도 어지럼증은 건재하다. 자꾸 발아래가 푹 꺼질 것 같은 착각을 착각이라고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한시가 급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지체할 수 없었다.
당장은, 이현견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S3. 거리
여기에서 S는 장면을 뜻한다.
연일 호외가 나돌았다. 금일 조간신문에선 이씨 집안에 고용된 변호사의 발언을 함께 옮겨두었는데, 어느 끈질긴 기자의 쾌거였다. 기사의 제목은 이러했다.
「머리로부터 폭사. 진실인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아낙이 말했다. “뻥 터져버렸다며. 그 안에 있던 욕심이 터진 것 아니겠어?”
술집에서 잔을 채우던 주당이 말했다. “사람 머리가 터지는 게 말이 되나. 필시 무슨 수작을 쓴 게지.”
여럿이 모였을 때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잣집의 기기묘묘한 파국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다. 골목을 쏘다니는 아이들도 동요에 욕심 많은 이 선생이 어떻게 되었다느니 하는 참혹한 가사를 붙여 불렀다.
하루하루 들리는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지는 관심의 불길에 장작을 넣었다. 내로라하는 무당이 굿을 해야 한다며 고함치다 기절했다는 둥, 사실 이 선생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걸어 다니고 있다는 둥, 진위가 중요하지 않은 언사가 쉼 없이 오갔다.
화룡점정으로 친척이란 친척이 몰려와 유산을 가지고 싸움을 벌이느라 장례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단 추문이 사실로 밝혀지며, 온 사방에 이만한 관심사가 없었다.
#S.3A 거리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오늘 자 신문을 집은 행인이 한 장을 넘기기도 전부터 혀를 찼다. 지면은 사건 조사에 진전이 없음과 더불어 죽은 이 선생의 가족관계를 서술하고 있었다. 어찌나 소상히 적었는지 변호사 한 씨의 ‘관심 꺼달라’는 부탁이자 경고만 한층 우스워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유의미한 기사는 아니었다. 그 집안 가족 관계가 어떠한지는 사건이 있기 전부터 모두가 안다. 호부의 아들이 견자일 순 있으나 견부의 아들은 필시 견자라, 빼다 박은 부자는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다. 아들 이현견이 제 부친의 급사를 빌고 또 빌던 걸 모르는 이가 있던가.
“말세야, 말세. 부위자강이 고릿적 말이 되었어.”
“새삼스런 소리를 혀? 그 아비에 그 아들이지. 재판을 한다더니만, 그 말은 여즉 없나?”
친우의 물음에 그는 신문을 몇 장인가 더 넘겼다. 빠르게 읽다 가게 주인이 헛기침으로 눈치를 보내자 얼른 도로 매대에 꽂았다. 신문을 돈 주고 살 생각까진 없었다.
“없어. 없어. 갈 길이나 가세.”
“허, 참. 뭣들 하는 건지.”
그들은 다시 세태 한탄과 자식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떠났다.
#S.3B 거리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바둑판을 놓은 평상 위에서 어린 청년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대국이 좋지 않았지만 흥미진진한 기사에 집중하느라 장고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변호사 선생님이 수상하다니까요. 이것 봐요. 기자더러 ‘몰라도 된다’니, 범인이나 할 법한 소리 아닌가.”
마주 앉은 청년이 백돌을 놓으며 기막힌 목소리로 핀잔을 던졌다.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래도.”
흑돌을 집은 청년이 촉새처럼 재잘거렸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집에 어디 드나들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구. 심지어는 돈 관리까지 전부 맡고 있었다던데, 재산이 탐나서 슥삭… 할만하지. 게다가요. 제 친구 사촌의 아는 삼촌이 그 양반을 근처서 봤대요.”
“너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이 선생이 암만 못난 사람이라도 한 변호사는 된 사람이야. 고작 돈 때문에 사람 해하고, 그럴 됨됨이가 아니다.”
“에이, 돈 앞에 장사 없다는데…….”
둘은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끝내 신문지는 둘둘 말려 한 구석으로 치워졌고,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서 흑돌이 던져졌다.
#S.4A 재판정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재판은 엉망으로 끝났다. 긴 시간을 판결 내지 못해 며칠이 미뤄졌다. 자리를 그득히 메웠던 방청객들은 진이 다 빠진 채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엄숙하게 시작했던 재판이 수라장이 된 건 한 사람 탓이었다. 피고 이현견은 아버지가 타계한 아들답지도 않았고 극악무도 살인사건의 진범 같지도 않았다. 그냥 답 없는 안하무인 망나니. 그뿐이었다.
짧지 않은 판 동안 그는 재판정 전체를, 심지어 때때로 자신의 변호사까지 닥치게 만들며 사건을 명징하는 일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동문서답을 늘어놓았다. 단지 모두가 그의 행패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였음이 패착이다.
그가 여러 차례 “사실은…” 하며 음흉한 목소리로 화두를 꺼내어 관객을 농락할 때마다 잡음이 사라지고 시선이 모였다. 이따위 전무후무한 사건 앞에선 침을 꼴깍 삼켜가며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작 죽은 지주에 대해 그의 아들이 늘어놓는 말은 하나같이 싸구려 농담 수준이었다.
“아버지가 조그마한 기계장치에 제법 관심이 많으셨는데, 그걸 머리에 심어보셨나 봅니다.”하고 상식적이진 않았으나 세상에 일어나는 각양각색의 우스꽝스러운 죽음들로 보건대, 약간의 인내를 끌어온다면 용납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생전에 대단한 인격자셨던 만큼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누군가 사랑이 폭발이라던데, 당신의 사랑이 과하셨음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어불성설 헛소리를 지껄여 수십 명이 동시에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사실 부친께 내 들은 바가 있습니다.”라며 집안의 치부를 못 이기고 꺼내는 것처럼 굴어, 더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했던 사람들의 이목을 또 한 번 모으곤 “고조부께서 집 지을 땅을 사실 적에 300년 묵은 신목 한 그루를 베었다더군요. 그러니 역심을 품은 귀신의 노릇이 분명합니다.” 따위 구시대 미신을 운운했다.
인내심 없고 나서길 좋아하는 누군가가 투척한 신문지 뭉치를 시작으로 난장이 벌어졌다.
생전의 피해자와도 당장의 피고와도 친밀하여 적극적으로 중재하질 못하던 재판장은 시시각각 떨어지던 위신을 보전하고자 급히 휴정을 결정했다. 박장대소하던 이현견은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찼다.
무엇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한 사람 탓이다. 엄숙하고 경건할 재판을 관전한 제삼자가 학을 떼며 이렇게 외치기에도 충분했다.
“역시 그 후레자식이 범인이야!”
#S.4B 재판정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변호사 한정호의 솜씨는 훌륭하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이 말이 명제로 여겨질 정도의 전적과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조차 시신도 의문, 범인도 의문, 흉기도 의문, 기소가 가능했던 것조차 의문인 재판은 겪어봤을 리 없다. 기소한 검사나 맡은 판사나 황당할 것이다.
“검시 기록을 봐주십시오. 피해자의 사인은 명백합니다.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폭발에 의한 사망. 그것도 외부 충격이 아닌 두개골 내부로부터의 폭발임이 자명하다는 소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아선 안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한정호는 질문을 던지고 잠깐 뜸을 들였다. 내심이 어떻든 판사를 바라보며 말하는 태도만큼은 흠잡을 데 없었다. 침착하게. 강경하게. 무엇보다 믿음직스럽게, 호소의 진실함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이것이 살인 사건이라면, 피의자가 사용하여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입증할 수 없는 죄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해야 할 말을 모두 마친 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으레 느끼곤 하던 안심과 해방감이 아닌, 허탈로부터 비롯하는 자괴감이 그를 직격했다. 재판관의 의례적인 문장이 벌레의 날갯짓처럼 귓가에 윙윙거린다.
마지막까지 살해 방법은 밝혀지지 않았다. 폭탄의 잔해 비슷한 물증을 찾지도 못했다. 사건의 순간을 목격한 자도 없었다.
명확한 증거라곤 없는 재판. 이 선생의 재산과 악명을 고스란히 상속받은 이현견이, 재판을 열고자 대단한 억지를 쓰지만 않았어도 개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리를 감수하고 재판까지 밀어붙였다.
혐의 없는 용의자는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가 될 것이다. 보나 마나 뻔한 결과를 알고 벌였겠지. 악취미다.
증거 없는 재판을 위한 준비가 변변할 리 없다. 한 변호사는 어떤 치열함도 없이 무고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태만한 판사가 무어라 말을 하고, 검사는 의욕 없이 무어라 말을 하고.
무의미한 절차가 오가는 동안 한정호는 힐끗 이현견을 보았다가, 때마침 이쪽을 보던 시선을 먼저 피해버렸다. 자조를 억누르려니 입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백주대낮. 상주하는 사람만 십수 명인 집이다. 그런데 흉기도, 흉기의 잔해도, 시신의 머리통-적어도 그것의 외벽도, 비명이나 폭음을 들은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목격자’라며 나온 이들은 한정호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경관의 말에 따르면 그리 주장하고 나선 사람 중엔 그와 일면식 없는 사람도 포함되었다.
이평갑의 머리가 폭발했다. ‘한정호’가 그곳에 있었다. 물증 없이 재판이 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실은 중요치 않은 질문이다.
#S.4C 재판정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판단에 앞서 중요한 것은 사실만 놓고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짙게 그늘진 눈가는 두꺼운 안경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퍼석하게 마른 피부가 며칠인지 셀 수 없을 밤을 뜻했다. 두통 탓이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믿는 것을 보는 게 아닌, 보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안경을 추어올리던 한정호의 시선에 이현견이 보였다. 의자를 기울여 탁상에 구둣발을 올린 채였다. 무시했다.
“사실을 따져보겠습니다. ‘그는 머리가 폭발해 사망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산가였으며 원한 관계가 다양했다.’ 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규명할 수 없다.’ 이 역시 사실입니다. 명백하게.”
거기까지 읊조릴 무렵이다. 구석의 이현견이 킥킥 웃었다. 분명 의자에 파묻힐 듯 앉아 있었는데,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탁상에 걸터앉아 발끝을 흔들거렸다. 비어버린 의자가 우두커니 이쪽을 보고 있다.
“‘그의 죽음은 규명할 수 없다.’ 그야 그렇겠지.”
이현견은 양장 바지에 손을 찔러넣은 불량한 자세로 던져뒀던 중절모자를 도로 눌러 썼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막무가내인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S.5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장면을 뜻한다.
단정한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한정호는 툇마루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규칙적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피곤한 마음을 달랬다. 본래 시끌벅적한 저택은 아니었음에도 오랜만의 고즈넉한 평화였다.
사랑채에 딸린 툇마루에선 마당이 훤히 내다보인다. 흰 대리석에 빗물이 어두운색으로 번졌다.
그사이 관리가 소홀해진 관목 몇 그루는 연초록 잎이 돋은 가지를 삐죽삐죽 뻗어냈다. 예년보다 싱그러운 이파리는 집주인의 피와 살점을 양분 삼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내리는 비가 그치고 나면 녀석들은 한층 힘차게 기세를 떨치겠지. 흉물스럽다.
전부 잘 끝날 것이다. 낙관이 아닌 냉정한 판단이었다.
호사유피, 이 선생은 죽어서 악명과 재산을 고스란히 남겼다. 아쉬울 게 많은 작자 중에선 그를 위시한 변호사를 무시할 만큼 간 큰 놈은 없다. 그의 죽음에 진정으로 통탄하는 놈은 더더욱 없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머리 잃은 시체쯤은 유야무야 덮으리라. 그럼 콩고물을 노리던 얌체들도 입맛을 다시며 왔던 길을 돌아갈 테다.
여전한 악명과 재산의 덕을 톡톡히 보아 안전한 한정호는 무거운 머리를 기둥에 기댔다. 익숙하지 않으며 익숙하고 싶지도 않은 평온함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S.5A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그는 눈을 감고 역한 기분을 잠재우려 애썼다.
이 선생은 죽었다. 그의 상속자가 그를 죽였다… 아마도. 적어도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 바에 따르면. 그러니 물증이 없는 재판인들 심증은 분명했던 거다.
이현견은 아비를 오랫동안 증오했다. 이는 부자를 몇 년에 걸쳐 지켜봐 온 자신이 아니더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감추질 않았으니까.
삼강이니 오륜이니 하는 관습을 도외시하는 망령된 요즘 세태에선 불효가 몹시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거니와, 신식 사내답게 이전 세대의 산물을 강경하게 거부하는 이현견을 본다면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증오하는 아비를 닮아서 부리는 행패도, 보는 사람 입장에선 저 후레자식이라면 패륜도 기꺼이 저지르겠구나- 할 수밖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피곤한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만.”
한정호는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뒤를 돌아보면 이현견이 문지방을 막 넘어오고 있다. 빗어넘긴 머리와 재킷만 벗은 양장. 마실을 다녀온 듯했다. 앉을 기색이길래 그는 옆으로 비켰다.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어둔 귀까지 내 탓을 해.”
비켜앉은 옆에 이현견이 털썩 자리를 잡았다. 우중을 돌아다닌 이의 옷에서 나는 비 냄새가 훅 끼쳤다.
“사람들 눈도 있겠다 어쭙잖게 돌아다니지 말랬더니. 어딜 다녀온 거야?”
“고명하신 한 선생께선 걱정이 팔자에 적혀있나 보오? 사고도 없었고 아무도 안 만났어. 집이 답답해 바람을 쐬고 온 것뿐이야.”
“네 저택이잖아.”
“그래. 이제야 ‘내’ 저택이지.”
이현견은 말에 강세를 두며 손가락 뼈마디로 마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목재의 둔탁하고 맑은 소리가 났다. 정작 내리는 비를 응시하는 저택 주인의 어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한정호는 조용히 물었다.
“적휘야. 본래라면 상주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생각보다 좋아 보이진 않아, 너.”
“뭔 심각한 고민에 빠졌나 했더니 내 생각이었나? 글쎄. 제법 좋아. 형 말대로 생각보단 별로고.”
느른하고 태연한 대답에 시선이 그를 향했다. 달리 묻지 않았지만, 이현견은 시선을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죽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쁠 줄 알았어. 그렇게까지 기쁘진 않소. 자꾸 혈향이 덜 빠진 듯하여 그런가, 아직도 내 저택 같질 않고……. 오늘은 비까지 와서 더욱 그래.”
그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죽어 나자빠진 이평갑의 시신 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댔다. 그 꼴을 사람들은 저마다 달리 해석했다.
이현견은 진정으로 제 아비의 절명을 소망하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한정호는, 이현견이 아비에게 ‘정말’ 바라던 건 아마 죽음 따위가 아닐 거라 믿었다. 이 선생을 살해한 진짜 범인이 설령 그가 맞더라도.
대화가 잠시 멎었다. 둘은 각자의 감상에 빠졌다. 비는 오후 내내 내릴 전망이다.
#S.5B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이 선생은 증오를 먹고 사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약하고 가난한 자의 고혈과 골수를 빨고 강한 자 앞에서는 염치를 모르고 아첨했다.
인간을 죽어 마땅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으로 이분한다면 명백하게 전자에 속했다. 사람들은 끔찍하고 불가해한 사건이라 수군거리면서도 곧 가래침을 뱉으며 ‘잘 죽었다!’라고 첨언했다. 무관하거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한 서린 평이 퍼부어졌다.
한정호도 언제나 그를 증오했다.
“그날 형을 봤어.”
나란히 앉아 있던 이현견이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날이 언제인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래. 아버지를 죽이는 형을 봤어.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야.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무슨 수를 쓴 건진 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조소하듯 덧붙였다. 한정호는 스스로 놀랄 만큼 침착을 유지했다. 그리고 목격자의 정체를 백방으로 알아내려던 일이 어째서 헛수고였는지 눈치챘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목격자 진술이 추호도 거론되지 않던 이유도.
“날 보았다고 증언한 게 너였군. 그래서였어. 기각됐다거나, 단순한 증인 보호라기엔 이상하다 했다.”
“입 닥치고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그는 여전히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있다 한들 빗물에 쓸려가겠지만, 마당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오랜 주인을 잃은 저택의 공기가 송연했다.
한정호는 막혀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익숙한 답답함이다. 끝없는 의심에 여러 차례 증명해가며 느낀 바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내가 아니야. 난 사무실에 있었어. 소식을 늦게야 전해 듣고…”
막힘없는 중언부언이 이어지는 사이 이현견은 말을 끊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참을성을 발휘하는 기특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그의 초점은 아직도 빗물이, 내지는 핏물이 흐르는 마당에 고여 있다.
유일한 청중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걸 금세 파악한 한정호가 체념하고 물었다.
“다 아는 얘기는 관두지. 너라면 네 증언 하나만 가지고도 날 잡아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어.”
“차라리 왜 재판을 열었냐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소, 한 변호사? 무의미한 건 매한가지요만.”
“그럼 그래. 왜 무의미한 짓을 벌였어, 적휘.”
물으라 해놓고선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눅눅한 습기가 목을 짓누르는지, 그는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한정호는 다시 묻지 않고 기다렸다.
늘 안하무인이던 녀석이 오늘따라 어딘지 불안정했다. 그는 목을 풀고 나서도 껄끄러운 조약돌을 입에 문 사람처럼 말했다.
“보려고. 한 형이 무어라 말하고 무얼 행하는지 보려 했어. 진짜 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맞는지 궁금했어.”
“…….”
“염려 마. 형이 죽이지 않았다는 걸 믿어. 내가 알던 백면서생이 그딴 해괴망측 살인범이 아니라는 걸.”
선친의 작고를 말하는 것치곤 무미건조하던 목소리가 더더욱 삭막이 낮아졌다. 이젠 침울하게까지 들렸다.
“그래서 난 나를 의심하고 있소이다. 내가 무얼 봤는지.”
그 말을 듣고서야 한정호는 그가 불안정하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의 변호사를 신뢰하는 까닭에 오히려 자신이 미친 건가 의심하는 중이라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으로서는 특히나 심란하겠지.
그의 신뢰와 고뇌를 마주하니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상속자인데.
감상과 함께, 뇌리에는 내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착상이 다시 스쳤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취급당할 것이 뻔해서 꺼낸 적 없던 생각이다. 이번엔 이쪽에서 주저하며 운을 떼었다.
“…가정을 하나 해봤어. 너도 나도 진실이란 전제 아래서.”
혀끝에 맴돌던 걸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길지 않았으나 잡설이 많아졌다. 이번에는 참을성 있게 듣는 이현견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가느다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형 말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애써 진지한 목소리로.
“괴물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건가? 한 변호사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죽인?”
“말도 안 되는 건 알아. 하지만 네가 봤지. 같은 얼굴을 했더라도 같은 사람은 아닐 수 있어.”
이현견은 코웃음 치며 무시하지 않았다. 상상과 다르게 조롱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숙고하다 허탈한 한 마디를 겨우 뱉었다.
“적어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냐’의 답은 되는군.”
#S.5C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가능하다고 생각해?”
“난 보는 것을 믿기로 했어.”
“난 회의적인데. 이렇게 생각해봐. 형이 날 보고 있어. 지금 이 순간 이 때에, 날 ‘정말로’ 보고 있다고.”
“그렇게 가정하자는 거지?”
“맞아! 일종의... 모의실험처럼 말이야. 시뮬—레이션.”
“시뮬레이션. 좋아.”
“그것이 내가 ‘정말로’ 이현견임을 뜻하나? 아닐 걸. 목격은 어디까지나 목격. 관측은 실존을 담보하지 못해. 형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차라리 믿는 것을 보기 마련이야.”
“비약이다. 넌 내가 ‘정말로’ 널 봤음을 전제했어. 네가 이현견이 아닐 수 있지만, 내가 이현견을 관측했다는 사건이 그런다고 사라지진 않아. 차라리……, 됐다. 쓸데없는 가정이야.”
“한 선생. 그저 시뮬레이션이잖소? 좀 더 해봐. 차라리?”
“…차라리…, 관측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모를까.”
“좋은 추론이군. 그럼 관측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전부 아집이 만든 환상이라면?”
“그럼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겠지. 정말 모든 게 말이다.”
“아니면 선택적으로 진실이거나. 그렇지?”
#S.6 항간
여기에서 S는 장면을 뜻한다.
하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고향으로 돌아갔다. 불만은 없었다. 아쉽지 않을 만큼의 넉넉한 돈을 받았으며 필요하면 다른 일자리로 소개도 받았다. 무엇보다 흉흉한 저택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 않았다. 사건을 향한 관심으로 튀는 불똥이 지긋지긋해서 치가 떨리고 죽은 상전이 귀신이 되어 나온다던 소문이 커지던 즈음이었다.
관리하던 이들이 사라지자 대궐 같던 저택은 빠르게 위용을 잃어 갔다. 날씨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며 돌은 금 가고 쇠는 녹슬었다. 그 대신 살아있는 것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담벼락 아래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히 자랐다. 샛문의 서까래 구석에는 거미 떼가 줄을 쳤다.
저택이 문을 걸어 잠그고 출입을 꺼린 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거세게 타올랐던 관심도 잠시, 문제가 샘솟는 시대에선 이 선생의 머리와 재산과 저택은 차차 흥밋거리 목록에서 사라졌다. 석간신문 귀퉁이에 작은 기사가 난 게 마지막이었다.
누군가는 참 기이한 사건이었다며 떠올리곤 저택의 안위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때 문턱이 닳도록 이 씨의 저택을 드나들며 으스대던 몇몇 호사가조차 입맛을 다시고 혀를 찰 뿐, 외부인을 거부하는 대문을 두드릴 엄두는 누구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 선생은 서서히 잊히고, 저택은 점차 낡아갔다.
#S.7A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삼 년. 그거면 되겠지.”
단절을 결정하며 이현견은 이를 삼년상이라 칭했다. 그다운 농담이었다.
일각에서는 한을 품은 아비의 귀신을 보고 정신이 나가 두문불출하는 게 아니냐는 음모도 있었는데, 늙은 하인에게서 소문을 전해 들은 그는 웃느라 눈물까지 흘렸다. 당연히 귀신을 보진 않았다. 두문불출도 아니었고.
“정말 떠나겠다고?”
“종종 연통하겠소. 여기로 보낼 테니 형이 받아.”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지내는 건 좋은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저택을 떠날 것까진 없다.”
한정호가 무겁게 충고했다. 짐 가방을 싸던 이현견은, 저택의 젊은 주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무탈을 가장하는 상한 얼굴엔 회한과 더불어 막연한 해방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의 얇은 입꼬리가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보는 사람의 경계를 부르던, 저택의 전 주인을 닮은 미소다.
“난 이현견이기 이전에 이평갑의 독자야. 이 선생의 후계. 아버지가 죽어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더군.”
“그래서 도망치겠다는 거냐? 악명마저 전부 네 것은 아니야. 이평갑은 죽었어. 네가 그 전철을 밟지만 않으면 돼. 도와줄게.”
“아니지. 아직은. 부전자전이라는 둥, 견부견자라는 둥, 떠드는 말이 나도 틀리지 않단 걸 나도 안단 말이야. 내가 계-속 아버지의 저택에 있거든, 내가 결-국 ‘이 선생’이 될 걸.”
한정호는 더 말릴 수 없었다. 죽은 이 선생의 아들은 그렇게 이 선생을 죽이고 남몰래 유람을 떠났다. 기약만을 남기고 저택으로부터, 아비로부터 도망쳤다.
달에 한 번꼴로 발신지도 내용도 없는 엽서를 받는다. 수신인을 적은 유려한 달필로서만 그의 무사를 확인할 따름이었다.
#S.7B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겼다. 이현견은 홀로 별채였다.
뒤뜰에 위치한 2층짜리 별채는 저택에 속하되 본채와는 거리를 두고 지어진 단독 건물로, 머리가 자랐을 무렵에 반쯤 내쫓다시피 주어진 그만의 공간이었다. 그가 집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곳이기도 했다.
하인들도 작은 주인의 으름장과 큰 주인의 무관심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던 장소라, 저택이 텅 비다시피 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인기척은 고사하고 술이 진열된 값비싼 장식장마저 부연 먼지가 쌓였다.
장롱문의 양각을 손끝으로 쓸어보자 뭉친 먼지가 까맣게 묻어났다. 그는 질색하며 손을 털었다. 상당히 오래 방치해두긴 했지. 가능하면 조만간 대대적으로 청소를 시켜야겠다. 혀를 차며 손이 닿은 술병을 꺼냈다.
제일 첫 번째 잔을 채웠을 때, 그는 먼지를 닦지도 않은 빈 탁자에서 잔을 한 손에 쥐고 둥글게 세 번 돌렸다. 그리고 쭉 들이켰다.
조롱 삼아 제를 올려서인지 제삿술의 맛이 좋아서인지, 착잡하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구부정히 움츠렸던 몸을 뒤로 기대자 푹신한 소파가 아늑히도 감싼다.
저택이 아무리 먼지 쌓이며 낡아가도 당장 보이는 풍경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기둥 나뭇결이 그리는 목문이 그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술병도 벌써 하나 하고도 반을 비워간다. 탁자 위에는 요깃거리 하나 없이 술병만 늘었다. 여전히 그는 상당히 또렷한 정신을 유지했다.
화나 흥에 겨워 마시는 거라면 마구잡이로 들이부을 주당이지만, 오늘은 간간히 시계를 올려다보면서 한 잔, 바람 소리도 안 들리는 문간을 돌아보았다가 한 잔, 느리게 잔을 홀짝였다. 값비싼 미제 축음기가 일곱 걸음 옆이었으나 음악조차 안주 삼지 않았다.
한밤의 적막 속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술을 연거푸 마시다 보니 머리에 열이 오르고 또 올랐다. 잘하면 머리가 터져버릴 수도 있겠단 공상에 몰두할 무렵이다. 언제 열렸는지 모를 문이 닫히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들긴 했으나 미처 입까지 가져가지 못한 주배가 허공에서 멈췄다.
‘왔다.’
멈췄던 손이 마저 움직여 잔을 입에 털었다. 흐른 술은 아무렇게나 닦고 잔은 내려두었다. 몸을 일으키진 않았다.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어둠에 잠긴 복도를 힐끔여도 아직 보이는 건 없었다. 청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려니 심박이 제일 거슬렸다.
이윽고 맥동 사이로 발소리가 들렸다. 구둣발이 마룻바닥을 딛는, 묵직하고도 맑은 소리.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던 숨이 멎었다. 싸늘해진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불청객은 딱 두 걸음을 걷고 멈췄다.
긴장으로 저릿한 손을 주먹 쥐고 펴길 반복하며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공포를 억눌렀다. 그의 두려움에 기름을 붓듯 지그시 밟힌 마루의 삐걱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하나, 둘, 적막.
고요를 깨뜨리는 선명한 소리는 신중하면서도 감추려는 기색이 없다. ‘다가가고 있다’를 똑똑히 알려주려 한다는 뜻이다.
이를 악문 이현견은 병을 다시 들어 놓았던 잔에 술을 채웠다.
또 두 걸음. 잔이 넘쳤다.
점차 걸음과 걸음 사이가 빨라졌다. 기대하고 있구나.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이 지척까지 왔을 때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뻣뻣한 목을 뒤로 젖히어 머리를 등받이로 받치곤 온몸에 힘을 뺐다.
그것이 문 앞까지 왔다.
이젠 멈추지도 않는 걸음으로 그것이 방 안에 들어왔다.
바로 뒤에 섰다. 내려다보고 있다.
이현견은 취기에 힘입어 천천히 눈을 뜨고 괴한을 마주했다. 맥 빠질 만큼 평범하고도 익숙한 얼굴이 미소 지으며 자신을 내려보고 있다. 수년을 봐온 한정호는 그렇게 웃는 법이 없었는데.
그는 마주 웃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너였군.”
#S.0C 이 씨의 저택
여기에서 S는 모의를 뜻한다.
모질고 극심한 통증이었다. 머리뼈 안쪽이 사방에서 뭉근히 짓눌리다가도 예기치 못할 때 군데군데 매서운 송곳처럼 찔러왔다. 그럴 때마다 시야가 희고 검게 점멸했다.
깜빡거리는 건 시체다. 방금 죽였다. 이 망할 두통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발치의 시체처럼 자기 머리도 터져버리고 말 테다.
오장육부가 배배 꼬이고 뒤틀려버린 것 같았다.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한데 뭉쳐 뒹굴었다. 여러 차례 세상이 뒤집혔다가 똑바로 돌아오고, 정작 돌아왔다 생각한 세상은 혼곤에서 잠시 깨어나니 기울어져 있음을 자각하길 반복했다. 정경이 파도쳤다. 끝이 보이질 않는 망망대해에 표류한 가운데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다른 소리를 전부 잡아먹던 이명이 가느다랗게 잦아들고서야, 그는 끙끙 앓기를 겨우 멈추었다. 통증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그를 괴롭혔으나 이 정도는 견딜만했다.
되찾은 시야로 다시 내려보니 머리 없는 시체가 있었다. 방금 죽인 것 같다. 여전히 환시를 보고 있다. 그러나 끝없이 존재하는 환각이라면 지각하는 자신에게 한하여 실재라 부를 수 있겠다. 그 자신에 대해 논하자면, 한정호라고 생각했으니 한정호가 (아마도) 맞다.
머리 없는 시체를 내려보고 있으려니 머리 잃은 이현견이 빙긋 웃었다. 부친과 꼭 닮은 웃음을 짓는다. 마주 웃어줬다. 머리 없는 시체에 대해 논하자면, 머리가 없자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이현견이라 생각했으니 이현견이 (아마도) 맞다.
사무실의 전등은 켜뒀고 창문을 통해 조용히 건물을 나섰다. 만났거나 마주친 사람도 없다. 경비는 사무실 안 자신의 실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부재 증명으로서 완벽하다. 그는 가슴을 한껏 부풀리며 주변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어스름한 새벽빛을 머금은 장미향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몇 번을 더 깊이 호흡하자 무뎌진 코에 희미하지만 역한 비린내가 끼친다. 속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좋아 보이진 않네.”
말을 걸어오는 어조가 짐짓 다감했다. 한정호는 당장 속을 게워낼 듯 몸을 수그린 채 괜찮다는 뜻에서 손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치솟은 두통으로 멀쩡히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잦아들었던 이명이 다시 들린다. 실재하지 않을 소리가 경종처럼 귀청을 울린다.
“어때. 불가해 범죄의 용의주도한 살인마의 기분인가? 세태를 어지럽힌 악한을 처단한 투사의 기분인가? 말 좀 해봐.”
머리 없는 이 선생이 계속 말했다.
입이 없어도 말은 할 수 있잖아.
욕지기를 삼킨 한정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이지러지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떠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못 해. 넌 죽었잖아.”
그렇게 본다면 그렇겠지만, 날 보고 있지 않소?
“무엇을 보는진 관측자에게 달렸어. 난 파리떼가 꾀이기 전에 가야겠다.”
실없긴. 다시 보자고.
한정호는 옷을 추스르며 자리를 피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저택은 어둠에 잠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