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참으로, 기구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때 자기 자신과 마주쳐야 할 일이 생김으로. 그렇기에 화창한 날, 볕이 잘 드는 카페 테라스에서 다비 디아즈는 자신의 오래 전 이름과 이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내민 명함. 깔끔하게 차려 입은 양복. 모자를 살짝 들어올려 자신을 소개하는 것 까지도. ‘해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목소리조차 자신과 모든 것이 달라 낭패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자신은 다비 디아즈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네요.”
들리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다. 그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 혹은 조금 거만한 듯한 자신감을 내 비추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수 백. 기 천 번은 했을 말투와 목소리, 그리고 당연한 얼굴로 그럴듯한 말을 뱉어야 하는데. 겨우 웃음 한 번 보이고 뭘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게 전부였다.
간혹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이름이 자신을 결정한다는 단순한 말. 누군가는 이에 동의하나 적어도 다비 디아즈는 아니었다. 겨우 이름 하나가 인생을 결정하고, 자아를 대변한다고. 그런 말은 믿지 않았으나 동시에 단순한 이 답에 확인을 받는 것이 의외로 가슴 쓰린 일인지도 몰랐다. 구김살 없이 펴진 정장. 환하게 웃는 얼굴. 손목에 찬 시계.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 소위 말하는 고생 한 번 한적 없는 외관. 겨우 외관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판가름 짓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신 같은 사람도 있지 않나 말해보지만 입이 쓴 것은 어쩔 도리 없었다. 괜히 수런거리는 마음을 닮은 것인지 테이블 위, 홍차의 수면이 일렁인다.
“소개받아 왔을 땐, 광고 에이전시를 하신다고.”
“그럼요. 지금까지 저희가 성공으로 이끌어 온 히트작들만 해도 손에 꼽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밀려 있어서요. 사적인 일은 조금…“
수십 번 연습한 것처럼 말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것이 다비 디아즈였기 때문에. 본디 그가 만든 이미지란 이런 느낌이었지. 말투는 길게 늘리며, 조금은 빼고. 하지만 사람이 가벼워 조금만 설득하면 넘어갈 수 있도록 어조가 들린다.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틀에 찍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여. 그 ‘다비 디아즈’가 할 법한 말들을 늘어 두고 나면 명함을 교환하고 일어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만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떫은 홍차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부를 지나는 바람도 희미하고, 세상이 단편적으로 마비된 것 같은 느낌. 의식적으로 세상을 느끼다 접어둔다.
의자를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하는 순간까지도 무언가 하나 모자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란 본디 잊은 것은 떠올리지 못한다고 하던가. 다비 디아즈에게 익숙한 길을 걸으며 쥔 명함을 손가락에 걸어 흔들어 본다. 해리 메이슨. 이름 어조를 곱씹었다. 변호사. 한 때 꿈 꿨던 일인 것도 같았다. 런던 주재 사무실. 나라 반대편엔 이런 삶도 있구나. 곱씹을수록 참으로 기묘한 기분이었다. 하필 이런 날, 하늘은 맑지.
이제와 떠올리는 사소한 일이지만, 다비 디아즈에게는 늘 해결되지 못한 고민이 하나 있었다. 철이 들고 이 생활을 이어가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은 해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지는 자신과 만들어 낸 주인공과의 간극이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묵은 고민과 함께 문득 뒤늦은 결심 하나를 해냈다. 아. 이제는 그만 해야 하나 하는 결심 말이다. 언젠가 있어왔고, 있을 고민이었지만, 이로써 확실 해졌다. 누군가에겐 비극이겠지만, 이는 장차 축복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다비 디아즈의 삶은 그만 일굴 때가 된 것이다. 날이 맑아 해리였고, 5월에 태어나 메이슨이었던 사람의 자리를 이제는 찾아봐야 하지 않나. 동시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곁에 오래 두어 도움이 되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결론과 함께 오랜 시간 방치한 자신을 먼지 구덩이에서 파내 들어 올려 본다.
고민은 길었으나, 결심은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완성됐으니 무대를 일궈야지. 그야말로 거대한 작전 하나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를 보고 굳이. 라는 수식언을 붙이겠지만, 이것은 다비 디아즈에게 오랜 세월을 지나가며 거쳐온 자신들에 대한 하나의 의례이자 예의로 통해왔다. 이것이 본인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더라도 제법 그의 삶을 통틀어 유서 깊은 전통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거대한 작전을 하나 세우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이별작전인 셈이다.
이 별 작 전
1.
호텔로 돌아온 다비 디아즈는 굴러다니는 메모지 하나를 뜯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둔다. 그것이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백지를 하나 펼쳐 보는 것. 아무것도 없는 계획에서 가진 이야기를 올려본다. 무대는 언제나 익숙한 영국의 런던. 주인공은 다비 디아즈와 그의 연인 로드니 머레이 애셔. 순진해 빠질 정도로 조건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 아니, 메모를 정정한다. 다비 디아즈를 사랑하는 사람. 그렇다면 왜 다비 디아즈를 사랑하는가?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본다. 애정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음으로. 기원은 늘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비 디아즈는 끝을 정확하게 내는 사람이었기에, 시작 역시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제법 명확하게 기억하는 순간을 적어 내려본다.
사교 클럽에서 만난 얼빠진 백작가의 차남. 말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족함 없이 자란 도련님인 주제에 제법, 예리했지. 백지를 횡단하는 만년필이 기록을 적어 나간다. 명함을 주며, 필요할 때에 자신을 찾아오라는 이야기와 동시에 행운이 되겠다는 말은 제법 철없는 도련님의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그저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한낱 출처모를 사람이 자신을 크게 뒤흔들 수 없을 것이란 확신도 더해졌겠지. 명함을 꺼내 보았다. 구김 없이 잘 보관된 종이를 돌려 보다 메모한다. 이것은 반드시 청산해야 할 물건이다. 그러니 보는 앞에서 돌려주는 것이 가장 나을까 고민한다. 혹은, 편지로 부칠 것인지를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어떤 것이 더 극적일지를 재어보다, 홀로 서 이 명함을 오래도록 내려볼 사내 하나가 떠올랐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한 남자를 말이다. 붉은 끼가 도는 다갈색의 머리가 손가락에 감기면 부슬거리며 흩어지는 게 좋았지. 침울하게 고개 숙인 머리를 쓰다듬으면 고개가 들리고 눈을 마주보는 얼굴이 떠올랐다. 안타깝게 되었다. 역시,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라니까. 그 옆에 어울릴 만한 상대를 어림짐작해본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빛의 눈.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어울리고 단정하게 차려 입어 로드니 애셔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말이다. 생각은 사선으로 떠올랐다 금세 사라졌다. 그러고보니, 아는 여식이 있었는데. 결혼했던가? 백지 위를 툭툭 펜으로 두드리자 검은 잉크가 터져 도화지를 적셔 낸다. 그제서야 다음 생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처음은 자신감.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고, 내가 찾으리라는 그 자신감 말이다. 그러니 그 증명은 반납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다시는 연락할 방도가 없으리라. 다비 디아즈는 확신했다. 메모는 이어진다. 그리고 그가 관심가진 이유. 그 두 번째는 아무래도 생소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회상과, 소탈함. 부자가 서민에게 끌린다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결과야 언제든 깰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 까지도 배려할 인간이라는 점이 문제지. 결국 이것은 너도 나도 같은 사람이노라, 그러니 내게 새로울 것 하나 없다. 고해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였으며, 언젠가 있을 일이기도 했다.
다비 디아즈는 늘 어떤 순간을 짐작하곤 했다. 같이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경험은 같이 겪는 것이 될 텐데.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이 없을 때가 우리의 끝이 아니겠는가? 하는 고민 말이다. 늘 그는 이 상상에서 마지막 하나를 떠올리곤 했다. 애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로 봐주던 상대가, 더 이상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눈을 맞추면 절절하게 알 수 있던 사랑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순간을 그는 늘 상상했다. 그럼 그 순간이 찾아와도 상처를 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쉽게 결단 내린다. 이것은 언젠가 찾아올 미래임으로, 미리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올렸다. 까보지 않은 통지서를 굳이 열어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뒤에 따라올 다른 질문을 자연히 예상한다. 혹자는 같이 경험한 시간이 중요하다 말하겠지. 그리고 동시에 어떤 한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 다비 디아즈는 다른 순간도 짐작하곤 했다. 언젠가, 실수로 자신이 다비 디아즈를 연기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겪어 온 모든 순간에서 사람이 달라지면, 그리하여 겪은 경험 자체가 거짓으로 점칠 된 삶이라면 말이다. 이 또한 의미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 역시 사람이기에, 어느 순간 분명 실수를 할 것이며 다비 디아즈와 해리 메이슨의 간극을 그가 버틸 수 있는지. 아마 없겠지. 그 때의 상처받을 표정을 상상한다.
이어지는 생각들의 나열이 가리키는 것은 합당한 헤어짐에 대한 변론이었다. 그러니 고해해야만 했다. 나는 당신에게 새로울 것 없는 사람이 될 것이며, 혹은. 너무나 당신이 아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 우리는 이제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자기 변명을 쭉 늘어 두면 이제와 떠올리는 과거들이 몇 있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해리 메이슨이라는 사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고, 캐치볼을 즐겼다. 사람을 재지 않고 의뭉스러운 대사 대신 편하게 말하는 게 좋았다. 비꼬지 않고 좋다 싫다가 명확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다비 디아즈와는 명백히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 연인을 떠올리게만 된다. 당신을 좋아해요. 라는 말에, 그래요.라고 답하지 않고 저도요.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게 이제 와서는 불명확했다.
마지막 한가지를 꼽아본다. 로드니 머레이 애셔. 애셔 백작가의 차남이 다비 디아즈를 사랑하는 이유. 불안감. 그가 내제하고 있는 불안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으나 필요하였기에 벌려 둔 거리감을 떠올렸다. 아쉽기에 안달 나고, 안달 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또 아쉬워지는 그 거리감을 계산해보았다. 전화조차 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했던 한 남자를 그려보는 것이다. 어쩌다 한 번 마주치면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매일 보내는 편지를 떠올린다. 일 년에 한 번 통화했던 시기, 그 때의 온기를 기억했기에 간절함을 안다. 알면서도 행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좋다고는 평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는 최선이라 여겼다. 이제는 회수할 때가 되었다.
백지로 적어 나간 세 가지 요소들을 확인한다. 자신감. 생소함. 불안감. 다비 디아즈와 로드니 애셔와의 관계는 이런 단어 세 개로 정의되는 사랑이었다.
여기까지 적고서는 침대에 등을 뉘였다. 흰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옆으로 눕혔다. 다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눈을 감으면 저 앞에서 바라보는 자신이 보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기인한 원인을 더듬어 본다. 무대에 배역이 아닌 배우가 뛰어 들어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너무나 로드니 애셔를 사랑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야, 해리 메이슨이 로드니 애셔를 사랑하는지. 다비 디아즈가 로드니 애셔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래서야 해리 메이슨이라는 자아가 희박했다.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기분은 좋은 말로도 좋지 않았다.
그러니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다비 디아즈가 만들어 낸 이 모든 판에서 우리는 우연으로 만나 사랑을 했으니, 이 우연성을 되짚어 다비 디아즈 뿐 아니라, 해리 메이슨 또한 로드니 애셔를 사랑한다고 확인할 필요가 있었으며, 로드니 애셔가 해리 메이슨을 사랑한다고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서야 영원히 헤매이며 의심하고 맛없는 홍차나 마시게 될 것이 자명했다.
나이 사십에 자아 찾기 여행이라니. 자조한다. 하지만 오래 된 이름을 다시 보았을 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한 직감이었다. 불가해한 확신이기도 했으나, 대체로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오래 미뤄둔 고민에 종지부를 불현듯 찍었다.
꽃과 폭죽, 조용한 크루즈 선과 오케스트라 악단들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헝클이며 다비 디아즈는 뒤늦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획은 세웠으니 실행할 때였다.
2.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데이트를 할 장소의 섭외는 당연하지만 쉬웠고, 이 날씨에 구하기 힘든 꽃들도 세월이 좋아졌는지 무리 없이 구해진다. 오랜만의 전화에 신난 기색이 보여 되려 들뜨기도 했다. 날씨가 지독하게도 좋은 날, 미리 구한 차를 그의 집 앞에 대곤 기다린다. 다비 디아즈가 으레 그러하듯 차 문에 기대어 비딱하게 환영했다.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얼굴은 반가움이란 단어를 써 두고 기다린 것만 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다렸습니까?”
보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한 번 눌린다. 대신 과장되게 인사하며 차 문을 열어 안내했다. 미리 넣어둔 인형이 그를 기다리고, 요란스러운 풍선들이 뒷좌석을 채웠다. 예상 못했던지 구겨지듯 웃는 사내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살핀다. 다비 디아즈의 사소한 습관 중 하나였다. 그러다 꾹 참은 웃음이 입가에 보이면 손으로 한 번 문질러 주고 말았다. 이건 해리 메이슨의 습관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언제부턴가 생긴 습관일지도 모르고. 확실히 통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디디. 이렇게 갑자기 영국에 올 줄은 몰랐어요.”
“사업이란 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니까.”
차에 올라 타 자동차가 부드럽게 움직여 도로를 달리면 해안으로 향한다. 준비는 완벽했으니 적당한 타이밍만 잡으면 됐다. 폭죽이 터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하루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익숙한 가족 이야기와, 클라우디아의 이야기. 일정하게 채워지는 일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빈 날들의 공백을 채웠다. 보지 않아도 상상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비 디아즈에게 늘 기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인생에서 단 한 번이나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최근 시모어 가에서 새로 사용인을 구하는 모양이에요.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 했는데 디디가 생각나지 뭐 예요.”
“안 갈 겁니다.”
“안 보낼 거고요.”
자칫 지루할 법한 인생인데 참으로 꾸준히 살아간다. 흘긋 백미러로 얼굴을 보면,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순간 풀어지는 얼굴을 보곤 다시 앞을 봤다. 귓가가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괜히 귓가를 만지작거리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도로 너머로 끝나지 않는 길이 보이고 헛기침을 하려는 찰나 기다렸던 질문이 들어온다. 트렁크 속의 풍선들이 같이 들뜨듯 날아갈 것만 같았다. 혹은 두려움일지도 몰랐고.
“그보다 디디. 오늘 무슨 날인가요? 풍선까지 준비하고.”
다비 디아즈는 꽤 훌륭한 연출가임으로. 이 순간을 꽤 기대했다. 그리고 기다렸단 듯 정해 둔 답을 말한다. 꽤 기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이별하는 날입니다.”
“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요. 디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멍청한 반문은 예상 못했기에 다비 디아즈는 잠깐, 아니 꽤 오래 침묵했다.
“가서 이야기합시다.”
이런 변수를 제하면 계획은 순조로웠다. 오랜 침묵이 차를 메웠다.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비 디아즈는 이정도의 원망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은 있었다. 그것보단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저 붉어진 눈가가 신경 쓰인다는 것 정도. 꾹 참는 기색이 느껴지면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필요한 일이래도.
도로를 달리고, 가로수를 지나쳐 마침내 해변이 나왔을 때 둘 중 그 누구도 탄성을 뱉지 않았다.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양 손을 꼭 맞잡은 로드니 애셔의 손만은 보았다. 조금씩 떨리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으나, 말을 더하진 않았다. 다만, 다시 말을 곱씹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과정이라 곱씹으면 한결 나았다. 하지만 역시 이것이 옳은가? 확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늦고 나서야 후회할 수도 없었다.
차가 한적한 펜션 앞에서 멈추고 한 사람이 내렸다. 다비 디아즈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차를 빙 돌아 문을 두드리면 로드니 머레이 애셔의 수심 깊은 얼굴과 마주쳤다. 가볍게 창문을 노크하는 것으로 시선을 맞춘다. 눈가가 발간 게, 곧 울 것 같다 여겨졌으나 용케도 울지 않았다.
“곧 해가 지겠습니다.”
“…네. 시간이 조금 늦었으니까요. 멀리 왔어요.”
문을 열어주면 뒤늦게 내리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을 따라 턱짓했다.
“좀 걸을까요. 라고 해야하지만, 당신 곧 울 것 같으니까.”
“디디. 전.”
돌아보는 얼굴이 보인다. 대꾸 대신 말을 끊으며 손사레를 쳤다. 트렁크에 올라타 걸터앉는 걸로 해변이나 바라본다.
“옆에 앉아요.”
다비 디아즈의 말 한마디에 얌전히 앉는 그 모습을 본다. 그러면 파도가 모래에 부딪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젠 정말로 이별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어느 배우의 멋없는 자기 고백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이제 그만 합시다.”
3.
해는 지고 있었고, 텅 빈 주차장에서 해변을 바라보며 걸터앉은 두 남성이 있었다. 막 이별 선고를 한 직후였으며, 받아들이기 직전이었다. 다비 디아즈는 자신의 손을 쥐는 어린 애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아직 말이 끝나기도 전인데 정말로 여기서 끝날 것만 같아, 잡힌 손을 빼내 뻗어 뺨을 도닥인다.
“다비 디아즈로 사는 건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디디.”
“쉿. 들어봐요.”
극의 뒷면. 배우의 일면, 그리고 진실. 아무도 모르는 사람. 잊힌 자아. 설명할 단어들을 꺼냈다 목 뒤로 넘겼다.
“저 포도 안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비 디아즈는 좋아하죠.”
말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팔을 뒤로 뻗어 트렁크를 짚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하늘이나 바라본다. 할 말이 아직 차고도 넘쳤다.
“이름은 해리 메이슨이에요. 나이는 서른 일곱.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학교는 안다녔고. 좋아하는 건 타코와 맥주. 싫어하는 건 스모크 치즈와 레드 와인.”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는지 조용해지는 옆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랑곳 않고 말이 이어진다.
“도박은 알다시피 꽤 좋아합니다. 행운으로 얻은 돈이 유일하게 내 것 같았거든요. 술은 깨고 나서 숙취가 심한 편이에요. 없다고 말했지만. 더 말하고 싶은데, 기억나는 게 없네요. 다비 디아즈는 백 가지도 넘게 읊어 줄 수 있는데. 해리는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알 시간이 없어 그런가.”
이제는 깍지를 끼고 뒤통수를 받친 뒤 아에 누워버렸다. 반쯤 진 석양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면, 어쩐지 저 끝에 선인장이 있을 것만 같았다. 다비 디아즈라면 이쯤 웃었겠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그냥 그대로 둔다. 속이 시원하다.
“이름이 삶의 전부는 아니죠. 명명이 바뀐다고 본질이 어디 가나. 하지만 말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름조차 모르는 데. 아무리 본성을 파악하고 있어도, 명명하지 못하면 증명할 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요. 예. 닭과 달걀 같은 이야기이고 배우와 작가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언어의 중요성이기도 한데. …뭐 그래요. 당신이 아무리 날 안다고 해도, 날 부를 수 없다면 돌아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하면서도 사실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았지만, 여러 단어들 중 정돈된 단어들만 골라본다. 결국 주절 주절거리게 되어 어쩐지 변명 같아졌다.
“하지만, 당신이 깨닫는 나의 본질은 분명 다비 디아즈의 것과는 다를 거라. 슬슬 디디, 이 사람은 정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연기를 하더라도, 나를 완전히 숨길 수 없죠. 또. 나도 영영 숨어 살 순 없을 거예요. 그걸 당신이 깨닫는 순간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럼 정말 끝일 테니까.”
“그건 아니…”
“모르죠. 내가 지금까지 알아 온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느낌. 겪어 본 적 있어요?”
“그것도 아니지만 분명…”
“난 매번 겪어 봤어요. 그리고 번번히 깨닫죠. 그 간극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몇 없어요. 계속해서 의심할 겁니다. 이게 그 사람인가? 이게 저 사람인가?”
“전 아직 아니잖아요.”
“로드니. 난 실패를 딛고 일어설 만한 시간이 없어요. 이미 무수히 많은 실패를 했거든요. 그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이번만은 다르다고 기대하며 살기엔 나이가 좀 있죠.”
비아냥거림 없이 차분한 말투가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툭 말을 뱉어 낼 것 같아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펴낸다. 다비 디아즈는 이랬겠지. 매 순간 떠오르는 설정된 말투가 맴돌면 그것을 애써 치워냈다.
“그러니 실패할 방법은 정리하자는 겁니다. 난 이런 사람이에요. 미리 말하는 거예요. 난, 다비 디아즈가 아니라 해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고. 아마 당신이 알아온 사람과는 조금 다르겠죠. 어쩌면 많이 일지도 몰라요.”
“그 말은…”
“이별 후에 우리가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죠.”
“디디, 결국 이별은 이별일 뿐일 텐데.”
“하지만 이별은 중요해요. 숭고한 작별을 내려야 기회가 생기죠. 다비 디아즈였기에, 당신은 불안했을 것이고 새로웠겠죠. 그래서 사랑했을테고요. 하지만 난 별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두고 싶지 않거든요. 이게 참 큰 문제입니다. 두고 가야 하는데 두고 갈 수가 없어요. “
품에서 오래 된 명함을 하나 꺼냈다. 손가락에 끼워 한 번 돌려보곤, 로드니 애셔에게 내밀었다. 어느 덧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바로 뜬 모습이 그의 등 너머로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만 이별하고, 새로 시작해볼까요.”
“전….”
“솔직히, 불안하지 않게 만들겠다. 장담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불안감을 이용하진 않겠죠. 난 다비 디아즈가 아니니까. 제법 뻔해질 거예요.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이유가 사라진 ‘나’일 텐데. 그래도. 만나 볼래요? ”
답이 나오기 전 쉿,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다. 아직 답이 조금 일러요. 당장이라도 답하려는 그를 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여 웃다 얼굴을 들면, 웃음기 가신 담백한 얼굴이 바로 보인다.
“하지만 디디는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다면, 이건 양보하죠.”
손에 명함을 쥐여주곤, 몸을 일으켰다. 트렁크 위에서 뛰어내리면 어안 벙벙한 애인의 얼굴을 보았다. 트렁크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다. 날이 맑아 해리였고, 5월에 태어나 메이슨이었던 사람의 자리를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정했다. 변명하자면 이대로 끝일까 무서웠고 예고된 결말을 상상했다. 그럼에도 아주 극적으로 평범하여 새로울 것 없는 미래로 결정지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떠 한가. 해리 메이슨.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이 이렇게 다채로운데. 이제부터 알아갈 것이 산더미인데 말이다.
“열어 볼래요?”
답하기 전에 오토 형식의 트렁크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 안에 꽉 눌려 있던 풍선이 우수수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아래, 잘 싸인 보석함. 해리 메이슨. 이 사람은 다비와 마찬가지로 극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다비라면 그 안에 반지가 있었겠지만 열린 보석함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열쇠였다.
“내 집 열쇠입니다.”
둥실 떠오른 풍선이 하나의 점이 되는 것을 보다. 로드니 애셔를 바라본다. 어리고 착한 나의 애인. 보답만을 기다리며 인내하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신이 괜찮다면 말입니다. 조금 더 욕심 내도 돼요.”
달이 완전히 떠오른 것이 보였다. 가로등도 없어 달빛만이 이 곳의 전부인데. 그래도 충분치 않아 손을 겹쳐 쥔다. 불안이 전부였고 순간의 기대에 목매게 만들던 순간의 연속이며, 본인조차 아니던 과거와 완벽한 이별을 고한다. 동시에 나의 옆자리를 온전히 내주겠 노라 말한다. 예정된 지루함에 걱정하고 불안해하기에는 우리는 지금 것 너무나 많이 서로를 생각하고, 지금을 너무나 적게 느끼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