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返魂: 돌아가는 길

   날이 무더웠다. 한참 멀리서 눈을 마주치고 있을 정오의 볕이 이마 바로 앞에 이글거리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풀밭 한가운데서 덜 자란 소년 둘은 보따리 하나를 나눠 들고 바닥에 달라붙을 듯 헐떡이는데, 그 아비라 하는 것은 한 손에 낫을 휘두르면서도 허리가 꼿꼿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장대같은 어른 하나를 따라가는 걸음걸이를 보고 있자니 오랏줄에 끌려가는 꼬락서니가 따로 없다. 허리까지 자란 풀은 대서의 습기를 머금고는 목이 뚝뚝 잘려나갔다. 푹푹 고개를 꺾는 풀대가리 사이로 가늘게 뻗은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조부의 생일날이 이렇게까지 말려 죽일 기세로 덤벼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했다. 물론 어머니였다면 칠성님 뜻이려니 왈가왈부 할 것 없다 말씀하셨겠지만. 성묘할 봉분까지 반이라도 오기는 한 걸까. 그런 식의 생각은 하면 할 수록 머리가 몸을 옭아맨다지만, 또 호통을 들을 소리겠지만. 그것 하나를 빼고는 다른 무어를 생각할 겨를이 나지 않았다.
   
   “정운아, 조금만 이쪽으로 붙어 볼래?”
   
   정우가 바람막이를 벗어 어설픈 손길로 동생에게 드는 볕을 가렸다. 정운은 엉거주춤하게 형의 오른손에 쥐여진 천의 한쪽 끝자락을 넘겨받았다. 얼굴 언저리에서 끊기는 엉성한 그림자가 나란히 걷는 형제에게 앙상하게 드리운다. 열기를 가렸다지만 열기 품은 사람이 곁에 한층 가까이 붙어 더위가 가셨는지는 모호하다. 정우는 턱 끝에서 달랑이던 땀방울을 문지르며 한참동안 아지랑이 굽이치는 땅바닥만 향하던 고개를 든다.
   
   시야의 가장자리, 마을의 자랑이라던 새하얀 조약 깔린 백사장은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아득하니 그 모습을 자랑하는데, 소금기 머금은 해풍마저도 기꺼운 순간에는 정작 바람을 흘려보내주지 못한다. 먼 발치에서 섬 해안의 남청색 바다가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바람 한 점 없는 벌판에서 한 손씩 잡아들어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소리는 오랫동안 자리를 맴돌고, 그제서야 이 자리 하나뿐인 어른은 집을 나선 뒤 처음으로 뒤를 내다본다. 땅바닥에 놓인 육중한 그림자는 형제에게서 비껴서는데, 도리어 그림자 아닌 한 쌍 매서운 눈이 소년을 짓누른다.
   
   정운은 조금만 쉬어갈 수는 없느냐며 칭얼거리기라도 해 보려던 심산을 고쳐먹었다. 그 생각을 접어넣은 것은 마음을 고쳐먹은 일보다는 부러 마음을 고장낸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형님은 그 중에서도 제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는 대개 어머니에게 매여 굿판 악사로 끌려다니곤 하던 형보다는 제게 관대한 편이었으나 올려다보기 위한 눈 한 쌍만이 제가 가진 것인 양 느껴지는 때, 정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것은 몇 차례 경험의 산물 정도보다는 차라리 열다섯 해 묵은 성문에 가깝다. 언제 뒤를 돌아보았냐는 듯 성큼 앞서나가는 큰 몸뚱이 뒤로 덜 자란 머리 둘 합해 나이 서른 몫의 종종걸음이 뒤따랐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조금이나마 호흡이 다소곳해지자마자 정우는 당장 어제 일러받은 오래된 무가를 흥얼거렸다. 기껏해야 한 나절 묵은 습관을 불문율처럼 다루는 것은 그것의 출처가 장곡 정우 홀몸이 아님을 알려준다. 강신무에 쓸 노래의 구보를 익히기 전에 가락을 외워 두어야 하지 않겠냐던 어머니의 지시에 가까운 전달에, 그것이 가 닿는 순간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한 번 끄덕임 아래에 다른 마음을 감출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고, 한 번이라 생각했던 일은 자주 이어질 많은 선택에서부터 자신의 의지를 찢어낸다. 그것이 자의에 비롯된 것인지를 판단할 몫은 대개 주어지지 않는다.
   쓸모라는 미명 아래서 소년은 종종 스스로를 시루에 웃자란 싹으로 보았다. 그것을 체감하는 일은 동생의 앞에서뿐이다. 뭇사람들은 그를 거푸집에 붙박혀 아이로만 일컬을 것이므로.
   
   얇은 목소리는 길게 늘어진 체념을 끊어낸 것과 같아서, 바스라지는 듯한 한 줄기 울림은 혼탁한 한낮의 틈으로 손쉽게도 가라앉는다. 그 곁에서 정운은 그늘 드리운 제 형의 옆얼굴을 돌아보고, 아무 일 없어보이는 듯한 아버지의 뒤통수 너머를 가늠한다.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산소로 향하는 걸음은 계속된다. 
   

   활등처럼 굽은 길을 화살처럼 달려갈 때
   저승길이 멀다하니 문턱 밖이로구나
   
   꿈결같은 세상살이 헌신같이 저버리고
   사람은 죽어 범이 되고 범은 죽어 꽃이 되네…

   
                         
   
   “언제 이 사이로 덤불이 다 자랐을까요?”
   “처음 보는 길이라… 미안, 잘 모르겠어.”
   
   공연히 힘을 실어 당기자, 무성히 자란 넝쿨 사이로 삐져나온 연갈색 가지가 정운의 손에 얇게 휘어졌다. 섬 밖을 나다닐 일은 잦다지만 섬 안의 일은 새장 안에 이리저리 머리를 박아대는 노고지리만 하지 못해 정우는 그것이 무용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것이 알지 못해도 가 닿을 수 있는 형제의 풍경이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 셋은 몇십 분만에 풀빛 아닌 색의 어우러짐을 본다. 탁 트인 하늘, 번지는 흰 줄기가 빛 비추는 덩어리 하나서부터 펼쳐진다. 정운은 용케도 지나왔다 싶어 뒤를 돌아본다. 본래 그리 키 크지 않은 나무만이 늘어선 흙길은 짙푸른 풀줄기들로 통채로 덮였다. 나무를 지주 삼아 자라던 것들이 저희들끼리 얽히고 설켜, 낫 하나로 헤쳐나가자니 양 끝 사람 드나들 구멍만을 남긴 통로 하나가 생긴 게 고작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길 아니라지만 산소까지 가는 길은 옷자락을 흙투성이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잔디밭의 청명은 난데없이 해진 모양새가 되고 만 한복 차림과는 반대편에 속해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 그리 크지 않은 진묘수 장식과 비석이 야트막한 땅의 쓰임새를 알린다. 정원수 크기로 가지런히 다듬어진 주목나무들이 뿔처럼 솟아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정운은 형에게 바람막이를 다시 걸쳐 주고, 막무가내로 함께 들던 짐을 넘겨받은 채 앞서나간다. 정우는 여전히 이 자리에 제가 있는 모양새가 낯설었는지 정운을 따랐다. 어머니 말씀 때문인지 한 번도 데려오신 적이 없으셨는데. 아버지를 지나며 정우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 표정을 살핀다. 그러자 아랑곳하지 않고 풀독 오른 손에서 진액을 털던 아버지의 호령이 정운의 등 뒤로 따라붙는다. 엷게 혀 차는 소리는 정우에게만 남겨진다. 
   
   “묘석까지 가서 가져온 젯밥부터 올려라. 정우는 돕기만 하다가 정우 어미가 말한 것처럼, 제문 읽을 때까지는 있어도 삼배 시작하면 멀리 떨어지고. 보지도, 듣지도 말라고 했으니.”
   
   어렸을 적에는 도리어 아무 말도 없더니 이제 와 영감도 없는 제게 구태여 그런 규율을 들이대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색했다. 신력이 흐트러지고 있다든지, 유독 접신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든지. 곁에서 악사를 하며 건너건너 전해들은 이야기가 반, 신병을 앓는 어머니를 목격한 것이 반. 그마저도 벌써 두 해 정도 지난 이야기였다. 일 때문에 신경이 조금 곤두서셨을 뿐이시겠지. 믿고 싶은 추측이었으나, 징조는 현실이었다. 
   
   달을 통틀어 한 손에 꼽을 정도인 네 가족의 밥상머리 시간에도, 네 자식이니 내 자식이니 하며 현과 주연이 언성을 높이는 일은 꽤 잦았다. 저러다 작두를 들고 오려 들면 어쩌나 싶어 그럴 때마다 정우는 정운을 데리고 어머니의 신당이 있는 별채로 향한 다음 대문 걸쇠를 걸어잠갔다. 빈 신당에 몇 차례 사람이 한 쌍씩 오가는 걸 본 적 있는데도 어머니는 신당을 잠글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것 또한 불안에서 비롯된 버릇의 일부겠거니 정우는 생각했다.
   
   별채에서 몇 번쯤 정운은 풀 죽은 채 정우에 기대 앉아 있었고, 날이면 날마다 싸움이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둔 불안한 자녀의 심정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적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정운은 모범생 노릇을 금방 졸업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죠, 하는 푸념과 함께. 그날로 정운은 어머니 아버지는 뒷전으로 밀어 두고, 신당 안 구경이나 하자는 식으로 돌아섰고, 정우는 그저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으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2년이 지나, 둘은 거의 신당 안 단청 무늬까지 기억해 그려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정우의 2년 묵은 습관에는 집안 날붙이들을 필요할 때를 빼고는 숨겨 두는 일도 있었는데 -꼭 구구절절한 가정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칠성신을 모시는 어머니는 내보이는 것 이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었으므로- 집안 식칼들의 신상에 대해 주연보다 정우가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 습관에 차질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종종 심정 모르는 정운이 집에 돌아와 과도를 찾는 때를 빼고는. 그럴 때면 정우는 어물쩡 동생과 함께 저녁을 차리며 대청에서부터 불어들어오는 바닷바람과 함께 드문 평온에 몸을 맡겼다.  
   
   
   정우가 다른 생각을 흘려보내는 사이 먼저 짐을 챙겨 상돌 위에 유기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정운이었지만, 그 솜씨는 기민함만 못하다. 잠시만 눈을 떼면 정운의 손이 꼬이고, 덩달아 풀벌레들 서넛도 같이 음식에 꼬인다. 
   
   “정운아, 이거 네가 가방에 담았어? 봉지에 육전 담고 그 위에 사과랑 배를 올려서 터졌는데… 아니야, 자리 남았잖아. 봉지 풀밭에 내려놓지 말고. 그냥… 내가 할게. 이리 줘.”
   
   다시 싸가도 먹기는 찜찜한데, 전부 고수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판단은 스치지만 그 말을 전해야 할 상대는 한두 마디도 잘 섞어주지 않는 아비라, 정운을 따라가는 분주한 손길보다도 예정된 일이 더욱 짐이 되고 만다. 곁에서 금방이라도 어물거릴 듯 손 둘 곳을 못 찾는 동생을 본 채 애써 파란을 눌러넣는다. 정우는 그 긴장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처음 따라오는 아버지와의 제사에서 제 형의 가시방석에 바늘침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는지 정운은 다시 곁에 다가선다. 
   
   “무어라도 도움이 못 되어서 항상 면목이 없습니다.”
   
   정운은 사과 하나를 집어들어 꼭지 부근을 과도로 벗겨냈다. 분재 다듬던 손길은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것보다는 좀 더 몸에 익은 버릇에 가까운 부분이겠거니 정우가 생각한다. 일머리는 지지리도 없는 동생이라지만 다행히도 과일 껍질이 갈갈이 뜯어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묵묵히 음식을 놓고 정우는 물러난다. 애써 고수레 이야기를 전하고 저 멀리 지나온 덤불숲 쪽으로 몸을 숨기는데 아버지는 말대로 하고 있는 이것이 맞는지 말 한 마디 전해주지 않아 정우는 다시 안절부절못할 심정이 된다. 비석 근처에서 가느다랗게 향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정우는 때맞춰 묘에서 눈을 뗐다. 그 짧은 순간 정운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얇은 날을 보고는 정우는 기겁했지만, 어찌 됐건 지금 당장 주머니에 과도를 왜 넣었느냐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제게 제사를 보지도 듣지도 않고 물러서 있도록 하였으므로.
   
   문득 지나온 덤불숲 쪽에서 한 줄기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정우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네 형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도록 해라.”
   
   어색한 침묵을 버티는 일은 대개 형제 둘 모두의 몫이었는데, 흐린 형체로 우두커니 선 정우의 곁에 아버지가 다가선다. 형님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못내 익숙치 않아서 정운은 망설이면서도 덩달아 몸을 돌린다. 
   
   “용무가 끝나면 네 형은 집으로 돌려보낼테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숲이니 바다니 헤집고 다니는 나쁜 습習은 들이지 말고.”
   
   마지막 말은 차라리 감시가 뒤따르리라는 위협에 가깝다. 정운은 제 아비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속으로만 들리는 뒷말을 덧붙이고,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따르는 것은 그의 천성이다. 그러한 종류의 마음이 형체를 갖추고 자리잡기도 전에, 정의할 수 없는 불가해로,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불필요로 남고 만 그의 형과는 다르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바람은 귓가에서 살랑이기 시작하는데, 그 짧은 간질임이 등을 떠미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정운은 왔던 길 쪽으로 내달린다. 엷은 호승심이 초의 심지처럼 타오른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매인 연에게도 연줄을 풀어 줄 잠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형님이라면 이해해줄 것이라고. 우리는 한 쌍이라서, 알지 못해도 가 닿을 수 있고 한데 묶여 산다는 것은 그런 일이라서.
   
   그리하여 당신은 모르고 나는 아는 것이 맞닿을 수만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운은 뒤를 돌아 깍듯이 인사하지 않고 여느 때같지 않은 장난기를 담아 팔을 휘젓다시피 흔들었다. 외출의 수신호가 닿는 이는 명확하다. 아비는 눈살을 찌푸리고 정우는 당장이라도 들끓을 듯 철없는 동생의 인사를 한 손으로 받아들고 황송한 채로 서 있다. 쓴웃음의 갈래일지 모를 미소가 밭은기침에 섞여나온다. 정운은 이내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뒤통수는 사라졌는데, 어찌나 서두르는지 그어낸 듯한 언덕의 정수리 위로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몇 뭉치 삐져나온 듯도 하다. 정우는 이 독대를 정운을 위해 견뎌 줄 수 있는 일로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는 편이 저 자신에게도 나았다.
   
   
   되짚어 돌아가는 길.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어지러운 덩굴이 게걸스럽게 한낮의 빛을 씹어, 뱉어낸 토막만을 가지들 사이로 툭툭 떨군다. 한참 허리를 숙여 걸어가고 있으니 첫 번째는 몰라도, 두 번째 알고 걷는 길은 망망하기만 하다. 걷다 걷다 몸이 지치니 머리는 두고 온 사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길이 한바탕 먹물 묻힌 붓질이라도 해둔 양 낯설다. 
   
   문득 내 자식이 환쟁이 피를 받았다 비꼬는 여느 부부 간의 싸움에서 바스라진 파편이 겹쳐 들리고, 다시 생각하여 낯설게 보이던 것마저 황당하다. 본 것을 그리는 환쟁이 자식이 보는 것을 제대로 못하자면 어쩌자고.  
   
   꺾이다 만 덩굴 가지는 베여 나간 풀대가리처럼 땅바닥에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아 주검이 산 것인 양 자리를 지킨다. 그 가는 몸들 수십이 대롱대롱 드리운 채로 흔들리며 꺼덕이는 통로. 그 길 속에 낯선 길이 하나 더 생겼다. 위도 옆도 아니요 아래다. 앞서 묘까지 오면서 용케도 발이, 몸이 빠지지 않은 것이, 아니, 그것보다는 눈에 담지도 못한 것이, 인상에 남기지도 못한 것이 괴상하리만치 큰 구멍이다.
   
   발 닿는 데 갈 수 있는 것 하나면 족한 방만한 소년 하나가 길이라고 불러야 할지 구멍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것에 검은 아가리 하나에 고개를 디민다. 그러자 떨구다시피 아래를 보는 아이의 얼굴에 희미한 향불이 피어올라 불온한 입맛을 다신다. 꺼질 듯 말 듯 들려오는 낡은 무가의 선율이 침방울처럼 튀어올라 감히 들여다보는 이를 적신다. 그것이 왜 형님 목소리를 닮았는지, 그리 들리는지. 한순간 정운은 의아해한다.
   
   그러니까 범 아가리에는 고개를 디미는 법이 아닌데. 제 몸에 참기름칠을 해 뒀다고 믿는 하룻강아지 하나가 있다. 정운은 얼마간 더 깊숙히 머리를 집어넣는다. 팔은 구멍 밖에서, 덩굴 탓에 시들시들해가는 풀밭을 그러쥐고 있었다. 딱 몇 초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휘청하며 머리가 아래로 쏠린다. 단박에 짧은 풀이 흙밭과 함께 뜯겨나간다. 풀물 흙물 잔뜩 든 손이며 덜 식은 대가리며 이럴 줄 몰랐다던 다리며 너나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아래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소리칠 줄을 모르는 입만 하나 침묵한다. 그게 꼭 짐승 귀에 더 무엇이 들려서는 안된다는 걸 눈치채서는 아닐 테다, 그 애는 제 아비 앞에서도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품을 줄만 알지 내지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요란하게 돌바닥에 온몸을 부딪히고 나니 낯선 신당이다. 정우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과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구멍 끝자락에서 웬 손이 뻗어 오던 것도 같아 정운은 한참 눈을 꿈뻑인다. 다시 고개를 들어 떨어진 곳 언저리를 올려다보니 까치발 뻗은 제 키보다는 높아보이는 출구에 그제서야 아차 싶다. 온 섬 다 쏘다닌 제가 집에 가는 길 못 찾을 일은 없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오색 풍등이 덕지덕지 붙은 신당에서는 희미한 재의 잔향이 풍겼다. 향불 냄새다. 노랫소리 하나에 이끌려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낡은 한옥은 어머니의 신당과 비슷하면서도 온 곳에 장독이 놓였다. 디귿 자 마루 세 칸으로 둘러싸여 돌바닥이 깔린 마당은 우물이 놓인 것을 빼고는 그리 좁지만은 않았을 텐데, 호랑이 석상 둘이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앉아 답답한 듯한 기색을 준다. 노랫소리는 구멍 밖에서 들을 때보다는 선명했지만 여전히 희미했다.
   
   무늬를 새기지도 않고 온 몸에 얼룩덜룩한 먹이 묻은 것이 특이해 정운은 호랑이에 가까이 다가서는데, 점정 안 된 눈동자가 제 쪽을 훑어보는 듯한 기색에 정운은 한낮에 선득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도 발 돌려 나가지 않는 것이 장곡 정운다움이다. 석상을 한 바퀴 빙 돌아 둘러보며 이것이 기시감임을 되새겨보려늗 듯, 정운은 호랑이 무늬 몇 군데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손 끝에 먹이 섞여 어둑한 잿가루가 묻어나는데, 다음 순간 한데 묶어 둔 긴 머리칼이 부자연스럽게 흩날린다. 
   
    난데없이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이 거세게 펄럭인다. 정면으로 부딪혀 오는 흐름에 정운은 무심코 눈을 감았다. 장독을 하나 괴어 열어 둔 채였던 사립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힌다. 석상의 그림자 쪽으로 돌아서서라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전신을 사로잡는다.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기도 전에 문득 발끝에 무언가 굴러와 닿는 느낌이 드는데, 어슴푸레 눈을 뜨자 문 밖으로 쫓겨나 깨졌을 것이 틀림없는 장독이었다. 
   
   “...”
   
   그제야 정운은 어금니를 악물고는 이곳에 발 들이는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는지 곱씹기 시작한다. 애써 고개를 돌려 신당 전체를 한 번 돌아보고 나갈 생각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집이었더라면 안채 방향으로 길다랗게 뻗은 우물 그림자 한켠에 잿빛 무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우두커니 뒤를 돌아 서 있다. 녹색 긴 머리, 왼손에는 제 형과 똑같은 팔찌, 그림자를 따라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짙어지는 탄내에 정운은 기시감을 느낀다. 
   
   “신당의 박수십니까?”
   
   남자는 돌아보지 않는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운은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말을 더 이어보려 하는데, 시도는 별 수 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몸 뒤쪽에서 목과 팔에 출처 모를 창백한 손이 뻗어오고 있었다. 남자에 정신이 팔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정운은 모를 일이었다. 훅 공기를 가르며 장독에서 뻗은 시취 풍기는 손들이 우악스럽게 몸을 잡아당기는데, 정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미안, 나. 그림자에서 나갈 수가 없어. 말을 거는 것 정도는 들렸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 이대로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한참이 지났을까. 저녁나절이 가까워 한층 꼬리를 늘린 그림자가 정운이 누운 마루까지 닿아 있었다. 이 분께서 눕혀주셨을까. 왼 눈가에 흰 열꽃이 핀 것을 빼고는 놀라울 정도로 형을 닮은 남자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잠긴 목소리로 건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운은 무릎배게 위에서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정운이가 나가 있지 않았으면 설명이 편했을 텐데. 아닌가. 정운이는 내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이러나 저러나 여기 내팽개쳐 뒀으려나. …혹시 이 애도 들리지 않는 건가?”
   
   그쪽 맹한 목소리가 안 들렸으면 진작에 온몸이 재투성에 얼굴은 화상 자국 가득한 초면인 사람이 해 주는 무릎배게를 받고 있을 때 기겁하면서 굴렀을 것 같습니다…. 정운은 어이가 없어 입 밖으로 굴러나오려는 말을 쑤셔박았다. 입 밖에서 나오는 정운이라는 이름에 몇 가지는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헤집어,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밀어넣었다. 고개를 돌려 보자 안경 없이 흐릿한 시야에 섬돌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제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발을 꿰기 좋은 방향으로. 그럴 리 없겠지만, 진짜 형님인가?
   
   “잘 들립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구경이나 좀 하고 싶은데요,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시간이 시간이니 신당 안에는 다 그림자가 져 있는데요.”
   “안돼. 그 중에서도 우물 그림자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지박령이라고 들어는 봤겠지. 너도 슬슬 돌아가. 아니,  …돌아가 줘. ”
   “좀 더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런 꼴 당하고서? 나 같으면 안 그래.”
   “그쪽이 아니니까요.”
   “말장난 하지 말고. 정운이 오기 전에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너, 정운이를 닮았는데 정운이는 아니잖아.”
   “그게 뭡니까? 제 이름은 장곡 정운이 맞는데요. 말장난은 당신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운은 벌떡 일어나 안경을 집어들어 썼다. 시야기 또렷해지자, 몸을 돌린 채 신발을 붙들고 끈을 매기 시작했다. 대개 어서 나가라는 재촉에 가까운, 남자의 푸념이 이어지는데, 사랑채 쪽 방향에서 저를 똑 닮은 형체 하나가 걸어나온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잿빛 무복을 입은…
   
   
   “신당은 한 쌍이 들어가서 한 쌍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차례 그쪽과 닮은 아이를 보내 준 적이 있고.”
   
   또 한 명 저를 닮은 그는 남자에 비해서는 사무적이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삿대질을 하는 모양새에 정운은 제 아비를 비추어 본다. 저를 닮은 무엇에 무엇을 견주는 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남자를 의식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에게 들리지 않는다면, 분명 보였을 것일 텐데도. 애써 무시하며 한 손에 든 족자를 힐끔대며 정운에게 용건만을 늘어놓는 모습은 미미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원한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도움을 청하는 말에 가까운데. 제 형님은 보시다시피 우물에 던져진 뒤로는 지박령이 되어서도 말씀을 못 하십니다. 무당이라는 작자들은 질색이지만,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도  이곳을 매개로 주술을 쓰는 비슷한 일을 하나 계속하고 있는데, 신당은 한 쌍이 들어가서 한 쌍만 나가야 합니다. ”
   
   그는 정운의 오른팔에 낀 팔찌를 빼어 가져가더니, 고압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날 셋이 들어와 셋이 나갔어요. 그래서 가진 물건 하나를 제가 가져가 신당에 남겨두었습니다. 이제 당신까지 들어왔으니 물건을 하나 맡겨두고, 그때 그 당신을 닮은 사람을 데려오세요. 그러고 다시 신당에서 나가면 됩니다.”
   
   일련의 과정에 정운의 의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막무가내인 행동에 정운은 잠시 남자의 말을 이해하고, 차라리 그에게 남자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자에게 그의 말이 닿지 않는 편이 배는 나았으리라 의미없는 동정을 보낸다.
   
   
   정운은 신당을 나섰다. 해는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인데,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낯선 숲의 풍경이 아니라 제 집 앞의 풍경이다. 분명 어머니의 신당을 나설 때만 보이던 구도가 어색하게 겹쳐져 있다. 다시 신당 쪽을 돌아본다. 의아한 듯 제 손으로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천천히 뒤를 돌아 집으로 향하려 하는데, 날붙이 몇 개가 든 상자를 품에 안은 정우와 얼굴을 마주친다.
   
   “또입니까?”
   “으, 응. 이번에는 아버지가 또.”
   “어머니가, 제사에 형님을 데려가신 걸 알아채서?”
   
   정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운은 한숨을 내쉬며 상자를 넘겨받았다. 제가 있으면 제발 좀 제게 맡기라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낚아채는 듯한 동작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운아, 여긴 그 폐가잖아.”
   “폐가요? 어머니 신당이잖습니까. …모습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위치가 같아요.”
   
   정우는 혼란한 확신 속에서 설명을 계속했다. 말은 대개 미끄러지다 형태를 찾지 못하다 덜덜 떠는 정우의 목소리 속에서 밤길을 더듬듯 불안하게 흘러나왔다. 
   
   “아니야, 이건 그 버려진 신당이야. 왜 이 자리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문에 그려진 무늬가 같아. 자귀골 할머니가 예전에 악귀가 붙었다고, 어머니께서 만신의 영감이 떨어진다고 한창 말씀하실 때, 그런 귀신 들린 장소만 찾아서 돌아다니셨잖단 말이야. 뭍에 나가서도 항상 그런 곳만 골라서 주무시는 탓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나는 따라가야 했으니까…. 잠은 안 오는데 어머니는 자꾸 주무시다가 일어나서 비틀비틀 춤추시기도 하고…. 
   
   아니다,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런 곳이 자귀섬에도 있었다고. 정운아, 안 그래도 신경 곤두선 어머니가 놓치셨을 것 같아? 또 나를 끌고 가셨단 말이야. 굿판 벌이는 걸 주선해주시던 신 씨 아주머니도 같이, 셋이서. 봐줄 사람이 두어 명 있어야 더 활개를 치는 법이라나. 거기, 어머니 신당과 똑 닮았었어. 그런데 내게도 보였다고. 말이 돼? 영감이 쥐꼬리도 없는 내게 보이는 정도라니. 소름이 끼쳤어. 밤새 온 몸에 불이 붙는 꿈을 꿨어. 눈알이 붙은 호랑이는 날 지켜보고, 무성하게 핀 꽃에서 팔이 뻗어서 날 붙잡고 있었어. 그리고 그 집 마당에 있는 우물에 던져졌어. 꿈 속에서 어머니는 이제 와서 신병이 다시 피는 게 내 탓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런데 그냥 이상한 꿈 정도가 아냐. 자다가 눈을 뜨니까 보인 그것이, 내 곁에 앉아 있었는데, 정말로 너를 닮았었어. 아니, 그냥 몸이 좀 큰 너였어. 내게 말을 걸었어. 동생을 데리고 찾아오라고. 그 집, 뜨고 싶지 않냐고. 그 말을 들은 게 나여서 다행이었지. 네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어…” 
   
   정운은 거의 흐느끼다시피 말을 쥐어짜내는 정우를 달래듯이 감싸안았다. 형을 닮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 순간 겹쳐 보였다. 정말 저를 닮은 것이 술수를 부리고 있다면 그 분은, 괜찮은 걸까.
   
   “그러면 돌아가죠. …하지만 여긴 정말로 어머니 신당이에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닮았다는 곳과 이 신당이 합쳐져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집 바로 뒤에 있으니 싫어도 길목을 지나쳐야 할 테고, 당장 어머니가 드나드실 거에요. 혹시 그것이 해코지라도 한다면 곤란해지니, 약속을 지켜서 더 날뛸 일은 없도록 만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형님께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다면요.”
   
   가고 싶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는 갈 곳이 없네. 상자 안에서 날붙이가 제 몸을 서로 부딪히며 찰칵이는 소리를 냈다. 정우는 탐탁치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운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정운이 한 팔로 힘을 실어 밀자, 나무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완전히 문을 열어젖히고, 정운은 앞장선다. 정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뒤따른다. 
   
   그러나 그 조심성이 무색하게, 어떤 선택을 비웃듯이, 호롱불은 형형색색으로 번뜩인다. 이번에는 일전의 저를 닮은 남자 하나만이 등을 돌린 채 저희들을 마주하는데, 둘이 들어와 둘이 나가는 이거면 됐겠거니 뒤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 어느새 자리를 옮긴 호랑이 석상이 나가는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심코 형제는 뒷걸음질치는데, 발치에 걸리는 것은 누운 장독들이다. 그것들이 온 마당을 꽉 채워 구르고 있었다. 
   
   
   한밤중, 좁은 방에서 눈을 뜨자 온 몸에 난 손자국 멍자국이 선명했다. 먼저 눈을 뜬 것은 정운이었고, 몇 차례 문을 흔들어 보고는 열리지 않는 무용한 것을 한 차례 걷어찼다. 한 쌍으로 들어와 한 쌍으로 나가라고? 정운은 잔뜩 약이 올라 방 여기저기를 헤집기 시작했는데, 방 한 구석에 걸린 남자의 족자와 그 아래 놓인 제삿상을 제외하고 볼 만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꼬인 와중에, 일어나자마자 흐느끼기부터 시작하는 정우를 보며 정운은 어찌할 줄을 몰랐고, 정우의 왼 눈가에 복잡하게 그려진 흰 물감 자국부터 문질러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미 눈물로 반쯤 얼룩지고 번져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 칠성신을 모신다셨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는 건, 우리 쪽 신당이 완전히 망가진 거야, 차라리, 선산으로 가야 해…. 그게 나을 거야.” 
   “진정하세요. 형님, 일단은 문부터 열 수 있어야 해요.”
   
   말은 그리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주머니에 들어있던 과도로 둘이 그려진 족자의 사람 그림부터 쑤시기 시작하는 동생의 모습에 정우는 맥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운아, 그게 아니라 문을 열려면 뭘로 잠겨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그 순간, 문 밖에서, 아니, 신당 전체에서 힘을 주어 내지르는 듯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스스로 문 밖에서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이들은 사라지고 말았는데, 정운도, 정우도 그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툭 하고 방의 불이 전부 나갔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방에서는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인 청사초롱과 주렴 나부랭이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한참 방문을 두드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고도 포기한 채 우리는 목이 쉬어 이불처럼 포개어져 깜깜한 방에 한참을 누워 있었는데
   
   툭툭, 툭툭. 반대편에서 문 두드리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누구 좋으라고 시작된 이야기가 아닌 이상 그것이 우리를 구해 줄 시의적절하고 믿음직한 어른의 손인사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어둑어둑 청사초롱 수십 개가 망가져 산더미처럼 방구석에 쌓인 곳에서 우리는 숨을 죽이고 간신히 방 안에 어둠을 들이려 가뜩이나 힘 없는 빛을 밖으로 새어 보내려 문에 손을 올렸는데 그러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는데.
   
   툭툭,툭툭. 발치까지 굴러온 눈알이 수십. 번들번들 기름칠을 해 둔 눈동자가 쉰. 구슬 하나에 먹 방울 하나가 아니라 하나 둘 셋 검은 점이 셀 수도 없이 헤아릴 수도 없이 우리를 생글하게 쳐다보고 노려보고 힐난하고 머지 않아 너희도 알게 될 것이라 입도 없이 키득대는데 재간도 없이 굴러다니며 수면 위를 튀듯이 퍽 퍽 사방에 온 몸을 박아대는데.
   
   문턱을 넘어서 우리는 뛰었다 날붙이도 팽개치고 창호지를 찢었다 왜 그제야 문이 잠겨있지 않았는지 생각할 새 없이 안채를 빙 돌고 담을 넘어 두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원했을 뿐인었는데 언덕을 넘어서 굽어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신당 쪽에서 왜 높이 불길이 치솟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싶지 않았다 쥐어짜내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처럼 굽은 …을 화살처럼 달려갈 때
   저승길이 …니 … …로구나…

   
   
   
   그 애는 열 다섯살에 영감이 생긴 뒤로 죽어서도 죽지 못했다.
   그러니 삶의 무게란 견줄 수 없고, 죽느니만 못한 삶이 있는데.
   우리는 살아서 만나고 죽어 서로를 만나고도 하나가 되지 못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우한 삶의 땔감이 되어 스스로 풀무질하는 것이다.

   
   “정운아, 눈이 이상해. 흰색, 팔찌에, 내 팔에, 몽돌에 눈알들이 붙어 있어…”
   
   그제야 한참을 뛰어 덤불숲을 가로지르던 와중에 동생은 형을 돌아보고, 왼쪽 눈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놀란 듯이 낯설고 선득하니 두려움 가득하니 망연하게도 바라본다. 한 차례 문질러 사라졌던 흰 물감의 자국이 모습을 되살려 피어난 듯 선명하다. 두 사람 모두가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한다. 한 발짝 앞에 다시 범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검은 구멍이 있었다.  
   
   끊어지지 않는 굴레가 스스로 궤적을 이었다. 소년들은 저와 똑 닮은 그들이 머지 않아 다시 찾아올 것을 예감한다. 그것은, 열다섯 나날의 그들과 닮았다기보다는 차라리 찍어낸 듯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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