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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cúrsĭo

  까슬하던 손끝은 이내 단단하게 굳었다. 손을 쉴 틈이 없었다기보다는 무방비함을 싫어한 탓이다. 그는 무지의 공포를 더 높게 쳤으므로, 차라리 정체를 알고 두려워하길 택했다. 제 몫이 배로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떠안을 수 있는 일이다. 애당초 저 하나의 목숨이 아니었거니와,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란 가벼운 발구름과 달랐다. 늪지대에서 허우적거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사태가 발발한 직후, 이것이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몇 사람들이 갑작스레 변해버리자 모든 풍경이 변했다. 법과 질서란 과거의 잔흔으로 남았다. 번듯하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던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전과 같은 지배가 통하지 않는 세계, 원초적인 광경. 그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누구나 한 번쯤은 무력해질 때가 온다. '인간'으로 남은 이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먹혀들었다. 레나르트도 그중 하나였으며,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축에 속했다. 우여곡절은 많았으나 살아남았다는 자체만으로도 행운인 세상이다.
   
   아셀마이어 레나르트는 익숙한 듯 손에 감기는 가방을 확인했다. 밑바닥이 너덜너덜해져서 자칫하면 쏟아져내릴 모양새였지만, 그는 눈으로 각자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물건들을 확인했다. 전공책, 노트북, 간단한 공책 따위란 흔적조차 없다. 가방의 겉껍데기는 같았어도 내용물은 천차만별이다. 쓸 일이 없길 바라는 둔기, 약간의 식량, 미약한 의료품, 한 벌 정도 될까 말까 한 옷, 건전지가 간당한 손전등, 언제부터인가 기록보다 땔감으로 이용하는 수첩, 어디가 모가 난 식기 등. 모두 여의치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풍요로운 이가 있을까. 항상 새것으로 바꾸거나 부족분을 채우는 상상에서 그쳤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언제나 쌓아올리는 과정만이 더뎠을 뿐이다. 그리고 절멸은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레나르트는 떠밀리듯, 동시에 기꺼이 모든 광경을 받아들였다. 쥐고 있던 것이 얼마 없었으므로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별다른 욕심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제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는 촉감은 선연했다.
   
   그날 이후 제 머리맡의 풍경만이 그대로였다.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시퍼렇고 맑은 하늘은 홀로 청명했다. 하늘은 저 아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친히 굽어봤다면 날이 흐렸을까. 하지만 창공은 굽힐 줄 몰랐기에 하늘이다. 저 고고함과 무심함이란 이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우습게도 이것에 반가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레나르트는 다시 수색에 집중하기로 했다.
   걸을 때마다 깨진 도로가 아무렇게나 짓밟혔다. 매 걸음마다 자잘한 돌 구르는 소리가 이어졌으니 어디 정갈한 구석 하나 찾기 어려웠다. 무엇 때문에 무너졌는지 알 수 없는 벽, 마구 휘어진 대문, 깨진 유리창에 진열대가 나뒹굴고 폐허, 폐가, 건실한 곳이란 저 높다란 천공밖에 없어 보이는 환경들. 간간이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웠다는 대피소만이 사람 살아갈 공간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레나르트는 어째서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는가. 이는 사람들을 향한 강한 불신도 아니었고, 가는 길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발을 딛고 선 환경이 어려울수록 분란이 생기기 십상이었다. 언쟁과 가벼운 다툼에서 끝난다면 모를까. 언제부터인가 사람 목숨 우습게 아는 세상이다.
   묵묵히 할 일을 하며 서로 간의 인의 안에서 움직이던 이에게는 몹시 위태로운 일이다. 그는 인간된 도리가 무너지는 광경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이따금씩 일어나는 파벌싸움마저 질려버렸다. 능치 못 했던 것도 한몫했다. 무리 속 질서 속에서 묵묵히 제 할 몫을 하다가 떠날 때가 되면 벗어났다. 몸도 마음도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이 역시 그에게는 큰 변화였다.
   
   각자 유리한 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머무를 수 없는 자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다. 거취를 옮겨 다님이란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옳다. 이제는 그럭저럭 방랑자의 삶에 적응한 상태였다. 고로 다양하고도 불안정한 세계가 레나르트의 몫으로 떨어진다. 무수한 타인들과 스치듯 지나가면 뭇 하나 남는 게 이 몸 하나였던지라.
   아니다, 둘이었다. 난세 속 우연히 마주쳐서 동행하게 된 사람. 공통점은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는 학연 정도였다. 친분은 언제부터 쌓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세상이 뒤바뀌기 전을 되짚는 일은 무의미했으므로 금방 생각을 접고 말았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저, 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 어요. 이... 대로, 면, 도, 동료들에게... 방, 해만 될지도 ... 몰라요. 레나르트, 당장 떠... 나세요!”
   
   “하지만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멜뷔에 님께서도 알고 계셨고요.  정말로 이 상황에서 죽음을 원하십니까? 당신께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나요?”
   
   “......아, 아니요. ...설, 설마, 요... 그럴, 리가 있, 겠나요...? 저 역시, 두, 두려워요. ...하지만, 다, 달리 방법이 없다, 면, ...어, 어쩔 수, 없잖아요? 무... 리에서 저, 저를...... ... 포기했고. 저, 역시... 제게 큰, 기대를 하지 않, 듯이... 저는 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언, 젠가... 끝은, 있을 테니까. 이렇, 게라면... 아, 아깝지 않, 아요.”
   
   “하지만 그날 말씀하셨지 않으신가요, 꼭 살아남고 싶으시다고. 누구나 살고자 할 텐데 어찌하여 그 소망을 버리십니까? 남을 해치며 생존한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으셨잖아요.
   …이렇게 언쟁할 시간이 없군요. 떠나셔야 합니다. 살고자 하는 마음만 갖고 가십시오.”
   
   “저는...! ...... 살고, 싶어요.... ...... 언, 언제나 그랬, 어요. 그건... 당연, 하잖아요. ...제, 제가 그래도... 될까요? 의문이 들어요......”
   
   “개인에게 역량과 재능의 차이도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하여 대비했을까요. ...감히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께서 부단히 노력했음을 압니다.”
   
   “아셀, 마이어, 저는…….”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가장 껄끄러웠던 순간이기도 했다. 무엇이 기억에 남았던가. 앞서 벌어진 다급한 실랑이도 아니다. 것보다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읽어낼 수 없어서였다. 떨리는 어조와 다르게 진한 복숭앗빛 돌던 눈동자마저 고요했다. 마치 따져 묻는 것 같다. 정말로 저 자신이 알고 있는지 못 믿겠다는 얼굴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입을 놀린 저를 질책하려 했을까. 어쨌든 제 말을 완전히 믿지 않으면서도 하지만 이것마저 제 주관적인 해석이었고, 멜뷔에에게 저의를 묻는 법은 없었다. 심지어 다시 돌아간데도 같은 소리를 해댔으리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나르트는 무심하게 돌아서는 성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 유일한 동행인은 이때 마땅한 선택을 하여 지금껏 인간으로 남아있지 않던가.
   
   몇 번 곱씹는다 하더라도 기억은 흐릿해져만 간다. 제가 본 얼굴인지, 제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간 표정인지도 알 수 없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여러 번 접었다 편 종이처럼 닳아 없어져 버린다. 우습게도 진실을 가려버린 것은 제 생각이었다. 회상을 거듭할수록 진실에서 멀어지는 감각이 아득했다. 왜 그런 얼굴이었는지 물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깔끔하게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이때를 기점으로 멜뷔에의 행동은 손바닥 뒤집듯 달라졌다. 그리고 레나르트는 그 뒤를 따르면서도 차마 이유를 묻지 않는 쪽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고, 굳이 묻질 않으니 제 생각에 매몰되기 쉬웠음에도 캐묻기를 더욱 싫어했다. 혹여 그때가 떠올리기 싫은 순간이라면 어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레나르트는 정신조차 고단한 상황에서 제가 근심거리를 더 얹어주기 싫을 뿐이었다.
   
   
   답지 않게 넋을 빼던 생각을 접었다. 아득히 먼 곳을 보던 눈이 현실로 돌아왔다. 평소 하던 짓이 아니었는데 마음가짐마저 판이해졌는지도 몰랐다. 긴장감을 매일 마주하다 보니 무뎌진 탓이다. 이런 잡념까지 길게 물고 늘어졌다. 레나르트는 애써 머릿속을 비워내고는 주변 환경에 더욱 집중했다.
   
   아직 새벽인 덕이었는지 특별한 기척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적하고 황폐한 길을 따라가던 발걸음이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본디 용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차고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채비는 여기에서 끝난다. 일정조차 간단했다.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나들이로, 목적지는 지도에서 동그라미 표시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빠르게 짐과 연료를 확인했다. 방금 낭비한 시간을 만회해 보려는 심산이었는지 손 하나는 날랬다.
   하나 차고에 있는 사람은 그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트렁크를 단단히 잠그려던 손이 멎었다. 하지만 먼저 드러난 것은 익숙한 낯이다.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감을 약간 놓아버린 레나르트가 반색했다. 표정만 풀렸을까. 본인만 아는 죄송함을 담아 사죄의 말을 내밀었다.
   
   
   “채비가 늦어 죄송합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차를 준비하려면 못 해도 30분은 필요합니다. 좀 더 기다리셔야 떠날 수 있어요.”
   
   
   가볍게 웃음기를 머금으면서도 눈은 열심히 제 유일한 동행자, 샤를로테 멜뷔에의 반응만 좇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제가 끝없이 탐구해도 알 수 없는 순간, 그때부터였는지. 멋대로 자리 잡은 버릇의 근원조차 안개로 채워진다. 아셀마이어는 서늘하게 불어오는 미풍 때문에 날리는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한 남색 도는 것이 어둠보다 선명했다.
   
   
   “동쪽 공터를, 말하는 거라면.... 이미 살폈어요. 쉬운 일이 되었죠.... ...... 이제는. 특별히 경계할 일은 없었어요. 이대로, 출발해도. 방해될 일은 없어요.”
   
   
   미약하게 떨리는 어조는 담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단한 기색은 없다. 모두가 생의 무게를 느끼고 있음에도 샤를로테는 꿈쩍도 않았다. 마치 자신이 떠안아야 마땅하다는 듯이. 샤를로테와 레나르트가 맥락을 같이하며 다닐 수 있던 원인이기도 했다. 아틀라스가 버겁게 하늘을 지고 있었을 때, 이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짓 하나 않았다. 어깨와 허리의 묵직함이야말로 생존의 대가였다.  레나르트는 천성이었고, 샤를로테는 뒤늦게 빚어진 행동이었으나 결은 같으므로.
   
   샤를로테 멜뷔에는 제 스스로 이른 하루를 열었다. 안락한 삶이 끝났다.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과제가 하루의 최대 고민이었던 대학생에게 어떠한 특별함이 있었던가? 샤를로테는 움직이는 데 능한 축도 아니었다. 황급히 거들어봤자 몇 박 느릴 때가 대다수였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며 인자했던 시선도 금세 매서워졌다. 서럽기도 했으나 저들 입장에선 당연하기도 했다. 다른 무엇이 아닌 본인 숨통이 달린 문제였다. 결국 어렵사리 한 무리에 속했으나 쫓겨나듯 도망치는 것도 그만의 살 방법이었다.
    하지만 살고자 해도 어찌 살아남아야 할지 몰라 두려워하던 자는 이곳에 없다. 두 손을 어찌 할지 모르고 부산스레 움직이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일련의 동작들이 정형화되었다. 그러면서 샤를로테는 무언가를 끊어낸 듯했다. 인간이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될 수 없음에도 필사적으로. 레나르트는 그 기색을 묵과하기 힘들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요, 레나르트. 당장, 출발해도... 손, 손색은 없어요.”
   
   “이른 채비를 하셨군요. 덕분에 일찍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이 쇠하여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그저,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이런... 상황에, 소풍을 나갈 줄은... 꾸, 꿈에도. 몰랐지만요.
   
   “사람 사는 세상이지 않습니까. 가끔 기분전환도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평소보다 레나르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겸사겸사 좋은 물건이나 장소를 발견해도 괜찮겠어요. 누가 이를 도피라고 하겠습니까? 서글서글한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으나 바짝 긴장한 눈이 샤를로테를 향한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샤를로테도 이전보다 밝은 기색이 맴돈다. 저번처럼, ...좋은 집이 있고, 아무... 일이 없다면, ...그야말로... 성공적인 휴양이죠. 그의 손에 들린 식기 몇이 경쾌하게 맞부딪히며 달랑달랑 들려있었다.
   샤를로테는 가볍게 떠오르는 기분을 즐겼다. 날도 좋고, 동료도 살아있다. 게다가 모처럼 좋은 다과를 발견했던 터였다. 끓은 물을 음미하는 수준과 차원이 달랐다. 모두가 색다른 기분을 맛보기 시작하자 소풍을 위해 아껴두었던 차가 출발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자동차는 신나게 앞으로만 내달렸다. 깨진 도로를 누비느라 덜그럭거리는 돌소리는 요란해졌다. 때아닌 나들이를 위한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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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관심한 하늘이 무성한 잎으로 가려졌다. 부러 일찍 출발했건만 도착한 곳은 녹 빛이 짙다 못해 시꺼먼 숲이다. 풍경 역시 장관이었다. 무언가 찍히고 부러진 나무줄기는 예사로 넘겼다. 사람들이 쓸고 지나간 흔적조차 잠시 눈을 돌렸다. 그들은 새로운 거처를 찾을 생각으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휴양지에서 업무는 최대한 피하고 싶지 않은가. 최소한의 조치만 취한 둘은 눈을 감고 잎사귀들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느꼈다.
   
   
   “오늘의 나들이는 어떠십니까?”
   
   
   반쯤은 날아가고 일부는 흙 자국이 남아있는 돗자리를 깔고 앉으며 묻는 소리였다. 레나르트는 조심히 돗자리 끝에 앉았다. 이 상황에 소풍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면서도 완전히 마음을 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휴가랍시고 꾸역꾸역 챙기는 것이었다. 그는 샤를로테가 편히 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저는 몰라도 멜뷔에만큼은 휴양의 목적에 맞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먼 길 탓에 벌써 어둑한 석양이 깔린다. 하늘이 빛을 잃어가자 찬찬히 샤를로테 멜뷔에의 반응을 살필 수도 없다. 컵을 쥔 손이 움직이는 모양만 보고 여유를 가지고 있겠거니 하는 것이었다. 샤를로테는 몇 모금 마시다가 관두고, 부드러우며 평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저번과 비슷해요. 한적하고...... 고요해서. 잠시 잊을 수 있지만... 잠깐의 천국이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에요. ...그러지 말고 아셀마이어도. ...... 들어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멜뷔에 님, 이번 차 맛은 색달라서 좋군요. 다음엔 함께 더 좋은 것을 들 수 있으실 겁니다.”


   
   물은 받을 수 있는 잔, 그리고 눅눅한 비스킷 둘. 샤를로테는 이 시간을 공유하고자 레나르트 앞으로 차린 것을 밀어주었다. 이렇게 변변치 않은 음식이 이번 소풍의 메인 메뉴였다. 그 지경인데도 티백을 찾아낸 것이 용했다. 물의 온도나 끓는 시간을 세심하게 잴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퍽 이전 세상의 모습을 흉내냈다. 색을 잃어버린 돗자리, 깨져버린 차, 스테인리스 주전자, 눅눅한 비스킷 몇으로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다. 지치기 쉬운 환경이었으나 지칠 수 없었기에. 과거를 동경하기 쉬웠으나 과거만 붙들 수 없었기에. 아예 그럴 수 있는 판을 차려두고 즐기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이요. 예전엔, 따뜻한 차를 골라마실 수도 있었고. ... 갓 구운 과자도, 들일 수 있었죠. ...이런 식의 휴식은 아쉬우면서도... 반가워요.”
   
   
   단순한 과거 나열인지, 푸념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들린다. 조곤거리는 말이 유난히 또렷했다. 멜뷔에는 한참이고 다과를 들었다. 레나르트 또한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편안함을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 멀리서 산짐승이 울고, 벌레 우는 소리만 한창이던 시간대에, 어둠 속에서 형형한 눈동자가 들어온다. 피곤한 기색이 없던 복숭앗빛 돌던 그. 동시에 레나르트는 알아차렸다. 샤를로테는 다시 기운을 차렸으나 이전과 같이 쩔쩔매는 행동은 없으리라는 것을.
   이들은 낙원을 찾아 헤맬 생각은 없었다. 같은 상황이어도 마음이 다르다면 천국과 지옥을 오가지 않던가. 아무리 황폐해진 세상이 진절머리난대도 도망치기란 어려웠다. 개인이 뒤엎는 데는 한계가 있기도 했다. 샤를로테와 레나르트의 결정은 간단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남는다는, 간단하고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아셀마이어,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돌아갈까요?”
   
   “네, 그러죠. 하지만 원하신다면 더 쉬셔도 괜찮습니다.”
   
   
   샤를로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쉬었어요. 저희는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요. 그와 동시에 너른 지도를 펼친 뒤, 펜을 꺼내 들었다. 그는 동그라미 몇 곳을 눈으로 대충 훑다가 아무런 표시도 없던 위치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다음 행선지의 결정 방법마저 간결했다.
   
   
   “다음에는 표시하신 곳으로 떠날까요. 새로이 짐을 꾸리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요. 우선 돌아가서, 마저 일을 해야겠어요.”

   


   그들은 발밑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자연이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대로 눌러앉았으리라.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안다. 이는 그들의 장점이자 생을 갉아먹는 단점이었으므로. 짐을 챙기는 과정도 일사불란으로 이루어졌다. 연달아 트렁크와 차 문이 닫혔다. 비틀거리며 출발하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경쾌했다. 도로에 죽죽 끌려서 이목을 끌지 않으면 다행인 행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매끄럽게 귀갓길을 내달렸다. 그나마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거처로 돌아간다고 하기에는 무거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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