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Great Escape

   쾅─!!
   
   거대한 폭발로 인해 검은 우주 정중앙으로부터 섬광이 길게 번쩍였다. 폭발에 휩쓸리진 않았지만, 그 여파로 우주 전함의 선체가 심히 흔들렸다. 내부에선 공포, 불안, 분노로 점철된 비명들이 터져 나왔고 일제히 진동으로부터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누군가 다급하고 절실한 음성으로 관제실 정중앙에 우뚝 서 있는 자의 이름을 불렀다.
   
   "대대장님!"
   
   높게 하나로 묶어 올린 붉은 머리칼이 큰 충격에 잠시 파도처럼 휘청이다 이내 평정을 되찾아갔다. 컨트롤 패널을 부여잡은 덕에 겨우 중심이 무너지는 것을 막은 그는 저를 부르는 외침에 즉각 반응하듯 머리를 굴렸다.
   
   "남은 개체의 수는?!"
   
   "이블린 호, 사일런스 틸의 적중으로 총 열두 체 격파 완료했습니다. 게티아 측 남아있는 현 전력…… 총 한 체 남아 있습니다!"  
   
   "승기는 이미 거머쥔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너지지 마라! 적을 앞에 두고 기세가 꺾여선 결단코 아니 된다! 사일런스 틸, 재발포까지는!?"
   
   "47% 충전 완료. 앞으로 8분가량 소요됩니다!"
   
   "대대장님! 사일런스 틸까지 기다리기엔 이블린 호의 파손 정도가 심각합니다!"
   
   "보조 엔진, 사용 불가! 중심 기어 파손 정도 78%, 현재 복구 작업 중에 있습니다!"
   
   "대대장님! 게티아 측, 재발포까지 앞으로 2분 48초 남았습니다!"
   
   "파동 방벽을 펼쳐라! 적의 충격포를 이 이상 받아주지 말도록!"
   
   "네!"
   
   "게티아 측 충격포의 응축 에너지! 120%를 돌파했습니다!"
   
   "대대장님! 파동 방벽만으로는 온전히 막아낼 수 없습니다!"
   
   "사일런스 틸 충전은 속행한다! 충격포 발사에 맞춰 소형 어뢰탄 여섯발을 동시 발사한다!"
   
   "알겠습니다!"
   
    이 지시가 과연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지, 더 큰 희생을 낳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이 전함의 모두는 대대장이 내린 선택을 의지하고 또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이견을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양측 다 절체절명의 상태. 서로의 이 한 발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대장의 어깨는 실로 무거웠다. 짊어지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럼에도 무너지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려는 이유는,
   
    "게티아 측, 충격포! 옵니다!"
   
   "이런! 게티아, 남은 미사일도 전부 발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쪽도 전력으로 응수할 뿐이다! 이블린 호 또한 남은 미사일 전부를 사용해! 하나도 남김없이 격파한다!" 
   
   "이블린 호, 전 미사일 발사!"
   
   보다 더 거대한 폭발과 눈부신 섬광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어갔다. 모두가 충격의 여파로 눈을 뜨지 못하고 사정없이 휘둘려질 때, 오롯이 컨트롤 패널 위로 손을 올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쭉 기다리고 있었다. 이블린 호의 고압 증폭 광선포, 사일런스 틸 발포만을. 그는 오랜 시간 함장으로서 이 전함과 함께해왔다. 때문에 오퍼레이터의 지시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블린 호의 호흡을 느끼고, 맥동을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수치가 아닌 오감을 곤두세워 전함의 흐름을 캐치할 수 있는 자는 현재 군 내에선 이 함선의 함장이 유일할 것이다. 순간, 이블린 호가 박동하며 외쳤다. 바로 지금이라고. 하여, 그는 망설임 없이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발포 버튼을 눌렀다.
   
   "사일런트 틸, 발사!"

*

   더스트 하퍼는 특수 공군부대 대장으로 국가의 높은 신임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응접용 소파에 앉아 아침 일찍 들어온 팩스를 한 장, 두 장, 넘겨보던 참이었다. 똑똑, 그의 개인실 문이 두드려진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상대가 도착한 모양이다. 약속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10분 전인 오전 9시 50분. 틀림없다. 적당한 시간에 한 치 오차 없이 맞춰 도착하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더스트 하퍼는 여유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고 약 2~3초가량이 지나,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인물이 그에게로 깍듯한 경례를 보낸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 지금 막 전선에서 귀환하였습니다."
   
   "그래, 오느라 수고했네 레드클리프 중령. 여기 앉게나."
   
   경례를 접고, 이번엔 가볍게 목례로 제의에 감사를 표한 뒤, 그는 마주 보는 소파에 앉아 반듯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이번 게티아 소탕도 훌륭히 수행하고 왔다 들었네. 과연, 그 레드클리프 대장의 자식답군."
   
   "과찬이십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전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하하, 겸손하긴! 이번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것도 자네의 뛰어난 상황 판단력 덕이라 들었네만?"
   
   더스트 하퍼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여 알렉시아 레드클리프를 격려하듯 큼지막한 손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크게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진 않지만, 알렉시아 레드클리프는 자신에 대해 높게 평가해주는 말들을 기껍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였다. 단지 표현이 서툴러 이런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가 늘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감사하단 말과 함께 최대한 기쁘게 웃어주는 것뿐.
   
   "아아, 그래. 상부로부터 전달은 받았나?"
   
   "무엇을 말입니까?"
   
   "표정을 보니 아직인 것 같군."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으며 아침에 도착한 팩스 중 하나를 알렉시아에게 넘겼다. 두 손으로 공손히 넘겨받은 그 서류에 적힌 내용은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온 서면이었다. 가운데에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특진'. 이어, 대상자의 리스트를 채 다 확인하기도 전, 더스트 하퍼의 팡팡 울리는 박수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축하하네, 레드클리프 '대령'! 각하께서 우수한 대원을 직접 선별하여 내려주신 특급 포상일세."
   
   "제가, …특진을?"
   
   "그렇다네! 하하, 좀 더 기뻐하라고 레드클리프 대령! 이걸로 자네 아버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셈이잖나!"
   
   "아, 하하. 예, 그런 걸까요…"
   
   그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레드클리프 가문은 대대로 유능한 군인을 배출해왔으며 이번 대는 특히나 전도유망하여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참이었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는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는 인재에 가까운 자였으나, 현재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다분히 노력을 기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성실함과 꾸준함 덕에 군 내 평가는 나날이 높아져 갔고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물론 마냥 좋은 소문만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수직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은연중에 경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마련이다. 격차를 뛰어넘지 못한 이들은 곧잘 시기의 늪에 빠져, 보다 위를 걷는 자의 발목을 잡아끌려는 안달을 비춰 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당연지사이며 이곳도 결국 예외는 아니었다. 레드클리프 가에서 나고 자란 이유로 검은 혜택을 받는 거라 떠들어대는 자도 수두룩했다. 
   
   허나, 알렉시아는 그런 말에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저 또한 어떤 공적을 세워도 아버지의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데다, 그들이 괜한 시샘을 떨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오롯이 제 능력으로 일구어낸 결과란 것을 입증하면 언젠가 자연스레 해소될 일이라 생각해서도 있다. 이번 전투가 꼭 그러했다. 특진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알렉시아는 딱히 명예욕이 없는 사람이라 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버지의 딸이라서가 아닌, '이블린 호'의 오래된 파트너, 함장 알렉시아로서 해낸 일이기에 의미가 있었고 또한 값졌다. 그 공로를 인정받았기에 내려진 특진이라 생각하면 나쁠 것이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외려 과분하다고 여겼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하퍼 참모총장에게 또 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것 정도. 이를 제하면 이번 일은 알렉시아의 재능이 재조명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에 차차 참모총장을 비롯한 윗선들도 저를 똑바로 보아주는 날이 찾아오리라 믿으며 특진 명단 표를 한없이 내려만 보았다.
   
   "아아, 그렇지 참. 자네에게 또 전할 내용이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팀 크래들(cradle)에 대해선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게티아 대응으로 만들어진 인공 배양 생체 병기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이잖습니까?"
   
   "그래, 역시 잘 알고 있군."
   
   더스트 하퍼는 두툼하게 살이 오른 턱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팩스로 받은 다른 한 장을 슥 밀어 알렉시아에게로 넘겼다.
   
   "레드클리프 대령, 자네 진급과 동시에 팀 크래들로 발령이 났다네. 하여, 2주 내로 이블린 호에 대한 인수인계를 완료하도록."
   
   "예?"
   
   알렉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상사를 바라봤다. 그는 알렉시아의 이런 반응 또한 예상했단 듯, 여유만만한 웃음을 띠며 테이블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셔냈다.
   
   "…참모총장님. 이블린 호는 늘 최전방에서 격전을 치르며 성과를 내온 아르키움의 중요 전력 중 하나입니다. 2주라는 짧은 기간 내로 인계할 수 있을 리가…."
   
   "알고 있네. 단기간으로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인수자로 준비해놨으니 그에 대한 걱정은 말게나."
   
   "하지만…!"
   
   "…레드클리프 대령."
   
   부드럽게 휘어 웃던 눈의 이채가 날카롭게 변한 것을 알렉시아도 감지했다. 그리고 이 이상 토를 달아도 소용없단 것을 바로 직감했다. 더스트 하퍼는 한번 내린 결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단코 물리지 않는 철옹성 같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군 관련자 중 그 고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거니와, 괜한 힐난을 받을 수 있으니 되도록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이 좋단 것으로도 또한 유명하다. 알렉시아도 이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저 분한 마음에 입술만 물었다. 이블린 호는 꼭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싸우며 견뎌내 함께 승리를 쟁취해온 소중한 전우였다. 이번 전투도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따내지 못했을 결실이었을 텐데, 그런 자신에게서 이블린 호가 떨어져 나간다면 저는 반쪽짜리 존재에 불과할 거란 생각이 든 알렉시아였다. 방금까지 느꼈던 성취감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들고 있던 종이 끄트머리가 꾸깃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전함 '이블린'을 꽤 오래간 책임져왔었지?"
   
   "예, 8년 정도 됐습니다."
   
   "허면, 그만한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지. 이해한다네. 왕년에- 나도 자네처럼 애선이 하나 있었지. '아슬란'이라고. 그 어떤 전투에서도 꿋꿋이 승리를 향해 독주하는, 당시 최고의 전함이었어."
   
   "…그랬군요."
   
   "하지만, 레드클리프여. 무엇이 더 국가를 위한 선택인지 그대도 잘 알 것 아닌가. 아무리 우리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최고의 전함이라 해도 게티아의 발끝에 겨우 미쳤을 뿐. 지구의 기술력으론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네. 지금도 보게나. 이겼다고는 하나 한 끗 차이였지. 전보다 잃은 병력도, 전함의 파손도도 현저히 높아. 그만큼 저 녀석들의 기술은 지금도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단 걸세."
   
   "예, 그렇겠죠…."
   
   "지난 6년간, 우리는 인공유기 생명체에 전부를 걸고 쏟아부었지. 그리고 그에 대한 성과 또한 확실히 보이고 있다네. 믿게나. 믿을 수밖에 없어. 이 연구를 위해 희생된 동료들의 피를 헛되이 해선 아니 되지 않겠나."
   
   "……."
   
   "크래들로 가게나, 레드클리프 대령. 자네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이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주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제가 더 무슨 말을 이을 수 있을까. 무슨 의견을 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상부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며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 그것이 군인이 지켜야 할 절대적인 법칙이자 기본적인 소명. 당연하다는 것을 앎에도 알렉시아는 어쩐지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상황에 수긍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허나, 보는 시야가 넓은 상단의 안목과 판단이 저보다 정확하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지 않으면 안 됐다. 납득하지 못하면 진전할 수 없는 그이기에, 현 상황에 대해 필사적으로 합리화시켰으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줄 희망은 그 생체병기, '인공유기 생명체'에 달렸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렇게 매듭을 짓고 나서야 알렉시아는 더스트 하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작은 응접실 안, 알렉시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종이에는 팀 크래들 내 통용되는 규칙과 주된 업무, 상기 사항을 전부 확인 후 서명하는 란 등이 존재했다. 팀 크래들은 인공적으로 배양한 생명체들로만 이루어진 특수 전투 부대이며 육성 및 훈련 과정을 거친 뒤, 게티아와의 전투에 실전으로서 투입된다. 이곳의 배양 생명체들은 게티아로부터 추출한 DNA를 인간의 유전자와 합성해 만들어졌다. 때문에 일반인을 웃도는 신체 능력과 지능 수준을 가지며, 각기 다른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세간에선, 이런 능력을 보통 '초능력'이라 일컫는다. 게티아가 뛰어난 과학 기술력과 더불어 특수한 능력을 담은 DNA를 보유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낸 인류는 대항 수단에 대한 연구에 진력을 다했다. 그 집념의 결과, 우리는 외계 침공으로부터 15년이란 세월이 들어서 겨우 그들과 맞서 싸울 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과학 발전의 대표적 산물은 우주 전함, 생명 공학의 대표적 산물이 바로 이들, 인공유기 생명체들인 것이다.
   
   인공유기 생명체의 배양은 대성공의 결과를 낳았으나, 유례없는 유전자 합성의 시도였던 만큼 불완전한 부분 또한 존재했다. 이들이 이능력을 지속적으로 연달아 사용할 경우, 심신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신체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무너진다거나, 이성이 약해지며 자제력을 잃고 폭주를 한다거나. 한계를 넘어버린 인공유기 생명체는 곧 쓸모를 잃은 셈과 마찬가지였다. 고장 난 도구는 사용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우 군은 즉결 처분을 이행하였다. 허나, 중요하고 몇 없는 산물이니만큼 망가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상부는 한 가지 묘안을 고안해냈다. 바로 군 내 우수 고위 간부들을 각 인공유기 생명체의 전담 감시관으로 붙여주는 것. 기본적인 훈련과 교육은 시설 내에서 시행하고, 그 외 실전 경험과 모든 책임 및 관리를 감시관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일대일 개별 관리이니만큼 집중적인 케어가 가능하며 상성 싱크로율이 높은 페어는 강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단 것이 연구원 측 주장이기도 하였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가 팀 크래들에 배정된 건, 단순 실적이 좋고 우수한 인재라서 만의 이유는 아닌 것이다. 인공유기 생명체와 감시관은 각자의 순응력, 판단력, 순발력, 전투력 등 군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과 더불어 신체 능력, 지능, 성격, 성향 등을 수치화한 뒤, 종합 점수를 내어 상호보완이 가능한 상대와 짝이 맺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파트너의 이름을 훑었다. 실험 번호 피험체 M-019816. 코드 네임은 프로키온. 인명 표기는 미셸 머레이. 활자로 된 상대의 정보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알렉시아는 별생각이 없었다. 군 내에서 시행된 연구라고는 하나, 실제 인공유기 생명체는 철저한 국가 기밀로 보안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최상단 인물이 아니고선 소문으로만 들려올 뿐, 실제로 목격한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알렉시아의 상상력은 그리 풍부하지 않다. 게티아 전담 전투 병기라고들 하니, 인간하고 영 다른 생김새를 지니지 않았을까 정도로만 추측될 뿐이었다. 어떤 외관을 가졌을지 예상가는 바가 하나 없었다. 인명 표기라고 하는 걸 보면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건가. 허나, 그것들을 감히 인간으로 볼 수도, 부를 수도 없을 거라 여겼다. 이능력이란 것을 사용한다지 않은가. 필시, 골격이나 체형부터 남다를 것이라 여겼다. 어쩌면 신체 일부가 게티아처럼 변형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능력 종류는 워낙 다양하다 들었고, 위험등급까지 매겨질 정도라면 말 다했지. 실제 병기는 다루는 자를 위협할 일이 없다. 허나, 이들은 다르다. 전투 병기라 불린다지만, 결국엔 생명이기에 자의를 갖기 마련일 것이다. '이블린'은 달랐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싸워나가도 그가 자신을 배신할 일은 없었고 저 또한 '이블린'을 놓아야 할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그가 기계였기 때문이다. 망가지면 수리하면 되고, 개인 의사를 지니지 않기에 외려 제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자칫 오판하면 둘 다 위험에 처하거나, 이쪽이 저쪽을 처분해야 하거나, 어느 쪽이든 간 긴장을 놓을 수 없겠단 생각이 든 알렉시아의 어깨는 부담감으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갑갑하게 들어찬 숨을 길게 뱉어내던 중,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제 귀로 꽂혀 들어왔다.
   
   "레드클리프 대령님, 앞으로 관리하게 될 프로키온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며 테이블 위에 적힌 저의 코드네임을 다시금 곱씹었다. 부드럽게 닫힌 문이 열리고, 물빛 머리칼을 가진 한 소녀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프로키온, 이분이 오늘부터 네 전담이 되어주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 대령님이시다."
   
   프로키온. 이 자가 그 인공유기 생명체인가? 생각보다 앳된 얼굴을 띠고 있고 무엇보다, 너무도 인간 같다. 걷는 모습, 짓는 미소, 내미는 손, 밝은 목소리, 그 전부가. 알렉시아는 저도 모르게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그를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악수를 받아주지 않는 무안한 상황에 프로키온 또한 퍽 당황한 얼굴이 됐다.
   
   "앗, 이, 이게 아닌가봄다! 죄송함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 대령님!"
   
   그는 빠르게 자세를 재정비한 뒤, 아주 깍듯한 군대식 경례를 알렉시아에게로 올렸다.
   
   "방금 전 무례를 용서해주십쇼, 레드클리프 대령님! 저는 프로키온이라고 함다! 부디 아낌없는 지도편달을 부탁드림다!"
   
   "무례, …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앗, 맞아. 크래들에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코드네임으로 서로를 부르게 되어있슴다! 이런! 실례를 거듭하여 정말로 죄송함다 대령님!"
   
   그가 허리를 90도로 굽혀 숙이며 전력을 다한 사과를 올렸다. 알렉시아는 아직 이 생명체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그의 높은 텐션감 또한 따라가지 못하는 마당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를 떠들게 할 수는 없었기에 천천히 그 어깨를 두드려주며 이만 되었다 일러주었다. 나직하게 부여받은 코드네임을 입에 담았다.
   
   "시터스. 그렇게 부르면 된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프로키온 중위."
   
   그저 인사말 하나 건넸을 뿐인데도 아이처럼 좋아하며 환히 웃는 인공유기 생명체를 보고 있자니 알렉시아는 입안이 텁텁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쾅─!!
   
   거대한 폭발이 일며 바닥의 타일이 산산조각 나고 우지끈 주변의 나무들이 꺾여나가며 지상에는 대파란이 일었다. 한창 사람이 많을 광장의 정중앙에는 불길한 섬광이 길게 번쩍였다. 다행히 폭발에 휩쓸린 사람은 없었지만, 그 여파로 주변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부상자가 빠르게 속출했다. 곳곳에선 공포, 불안, 분노, 절망, 슬픔으로 점철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무기를 손에 든 자들은 그 대 소란으로부터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대폭발에도 일체 흔들림 없이 우뚝 서, 균열의 원흉을 노려보던 자가 지시를 청했다.
   
   "시터스 대령님!"
   
   높게 하나로 묶어 올린 붉은 머리칼이 큰 충격에 잠시 파도처럼 휘청이다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광활한 무중력 공간에서 지내왔던 그는 새삼 중력의 존재에 감사하며 튀어나온 지면의 타일 끄트머리를 붙잡고 서서히 몸을 곧추세워갔다. 저를 부르는 외침에 즉각 반응하듯 머리를 굴렸다. 분명 낯설기 그지없을텐데도 어쩐지 익숙한 감각이었다. 두 사람은 꼭 오래된 전우처럼 합이 잘 들어맞았다. 그래. '이블린'과 호흡을 맞출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어째서지? 두 존재는 전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또한, 이번이 두 사람의 첫 출전, 처음으로 합을 맞추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프로키온의 생각과 움직임을 읽는 것이 수월하였고, 그 또한 제 지시에 따라, 혹은 예측이라도 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적들을 소탕해나갔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합류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격전지에서 이만큼이나 대활약을 하고 있으니 누구든 놀랄 노 자일 테다.  
   
   쩌저적─!!
   
   프로키온이 한 발 딛은 곳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의 주 이능력은 '중력'. 지구 내임에도 인력과 척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자신에게 적용할 수도, 특정 대상에게 적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뛰어난 신체 능력에 이능력까지 더해졌으니 아무리 인류보다 뛰어난 유전자를 소유한 게티아일지라도 이 전투에선 상당히 고투하는 듯했다. 프로키온은 제 명이 떨어지는 순간, 총알처럼 튕겨 나갈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딱, 한 마디면 된다. 눈앞의 적을 제압하라. 승리를 알리는 고지까지 딱 한 걸음이면 됐다. 프로키온도 그를 알기에 태세를 갖춘 것이겠지. 해서, 호령을 내릴 참이었다.
   
   ─두근.
   
    그때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에 일순 현기증을 느꼈다. 방금 그건 뭐지?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허나 이 기시감은… 아니, 경우는 다르지만 분명 비슷한 일을 겪었던 바가 존재한단 사실을 알렉시아는 깨달았다. 떠올리고 행동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소요됐을 뿐. 그 짧은 찰나, 그는 기억해냈다. 그리고 나란히 어깨를 둔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프로키온, 멈춰!"
   
   당장이라도 튕겨져 나갈 것 같던 그의 몸이 탁하고, 꼭 맥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적을 두고 한눈팔지 않은 그의 판단은 실로 훌륭했다. 마음이 편하다.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자연스레 통하는 이 감각. 그래. …너와도 그랬었는데.
   
   탕,탕,탕─!!!
   
   이윽고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종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

   광장은 대 전란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아닌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곳곳에는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굴러다니며 지면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 낭자했다. 그런 몰골사나운 풍경에도 주변은 떠들썩함 하나 없이 차분하고 잔잔했다. 사망자는 0명, 허나 일반 시민을 포함한 부상자는 다수 발생. 한쪽에는 거처 잃은 주민들을 위한 임시 보호소로의 안내가, 다른 한쪽에는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해 마련된 임시 진료소로의 안내가 이어졌다. 
   
   알렉시아와 프로키온 또한 임시 진료소 근처에 설치해둔 군부대 전용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연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게티아의 촉수가 날카롭고 빠르게 치고 들어오면서 프로키온의 다리에 큰 상처가 남겼다. 알렉시아는 지시가 늦어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프로키온은 괜찮다며 멀쩡하니 된 거 아니냐 웃으며 그를 위로하는 듯했다. 어쩐지 그 말이 더 가슴을 죄어오는 듯한 건 기분 탓이었을까. 만일 독성 DNA를 보유하고 있는 게티아라면 상처를 타고 바이러스가 침투할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이에 관한 검사는 필수적으로 진행돼야 했다. 프로키온의 혈액 샘플을 검사반에 넘긴 알렉시아는 37.4도의 미열 증세를 보이는 프로키온에게 얼음주머니를 쥐어주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맞이한 승자의 휴식보다 달콤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얼음주머니에 뺨을 부비며 늘어져 있는 그를 보며 엷은 미소를 띠던 알렉시아는 전후 처리를 돕고자 막 텐트를 나서려던 참이었다. 
   
   "저, 저기. 대령님."
   
   "응?"
   
   조심스레 불러세우는 소리에 알렉시아는 옮기려던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프로키온 중위.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아, 아님다. 그건 아닌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슴다. 괜찮겠슴까?"
   
   "그럼. 무엇이지?"
   
   알렉시아는 슬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용건을 듣기로 마음 먹고 아예 몸의 방향을 그쪽으로 틀어냈다. 잠시 우물거리며 주저하던 프로키온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게티아 측, 마지막 개체가 남았을 때 말임다만, 어째서 제게 멈추란 명령을 하신검까? 딱 한 걸음이면 됐었는데… …혹시, 제가 못 미더웠다던가 그런 건,"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자네는 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어. 신뢰할 수 없단 이유라니 당치도 않아."
   
   "그렇다면 왜……."
   
   알렉시아는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때의 그 감각. 낯설면서도 익숙하며 더 나아가 모종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감각이었지. 자신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어떻게 말로 풀어내야 할 지 고민이 됐을 뿐. …잠시간, 둘 사이에는 묵묵한 침묵이 흘렀다. 시선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알렉시아가 드디어 프로키온과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대와 공명했던 게 아닌가 싶어."
   
   "예?"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니 말이 좀 이상하군. 풀어서 설명하도록 하지. 나는, 자네의 이상 반응을 감지했어. 심박수가 현저히 높았고 혈압이 대폭 상승해서, 마치 뭐랄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막 돌입하기 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냥 느낌이었어. 느낌일 뿐이지만, 결단코 무시해선 안될 직감. 그래서 내 나름 확신을 갖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대의 실력을 저평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상 힘을 사용했다간 그대가 위험해질 것 같았어. 그런 예감에서였다."
   
   "…그랬, 군요. 그래도 아까운 마탄을 세 개나 발포하지 않았슴까. …그럴 바에 제가 나가는 것이,"
   
   "아니. 마탄을 소비하는 게 나았어. 자네를 잃을 바엔."
   
   "……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검까?"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말 같았다. 그는 의아하면서도 대답을 갈망하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알렉시아는 제 팔꿈치를 느리게 쓸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어쩐지, 내 오랜 전우와 닮아있어."
   
   "전우…?"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느꼈지. 그래, 참 많은 것이 닮았어. 그래서인지 더 신경 쓰게 되는 것 같더군."
   
   "그렇슴까."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 더 질문하고픈 것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알렉시아는 그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입을 열기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둘 사이에 또다시 묵묵한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무겁게 닫혔던 입이 열리려던 순간,
   
   "충성! 시터스 대령님, 프로키온 중위에 대한 검사 결과를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아, 아아. …알겠네. 금방 나가지."
   
   텐트 밖에서 우렁찬 소리로 저를 부르는 이를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 프로키온의 체내 감염에 대한 검사 결과이니만큼 꼭 들어둬야 한다고 여겼기에 알렉시아는 프로키온에게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프로키온 중위, 잠시 다녀오겠다."
   
   "저, 저기 대령님."
   
   "응?"
   
   "그, …실례가 안 된다면……."
   
   눈썹이 축 늘어져 있다. 푸른 눈이 꼭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런 표정인 걸까. 어쩐지 마음이 약해진 알렉시아는 그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나직하고 부드럽게 되물었다.
   
   "괜찮다. 말해봐."
   
   "저, 대령님의 그 전우분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슴다. 괜찮으시다면…."
   
   '이블린' 말이지… 알렉시아는 프로키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대답을 대신하는 손길은 부드럽고 느릿했으며 이에 안정감을 느낀 모양인지 프로키온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능했다. 지금의 이 행위 또한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리라 보지만, 그럼에도 알렉시아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다녀와서 알려주마."
   
   "네, 다녀오세요."
   
   그가 말간 하늘 아래 바다처럼 웃어 보였다. 알렉시아는 이 미소를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 켠에 묻고 천천히 새 파트너로부터 떨어졌다. 프로키온으로부터 가벼운 배웅을 받은 뒤, 그는 텐트로부터 천천히 빠져나왔다.

*

   피험체 M-019816. 심박수 정상. 생체 반응 정상. 이능력 수치 적격. 사출합니다.
   
   빛이 보였다. 잡아먹을 듯 발광하는 빛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창백하고 푸르스름한 방, 삭막하고 차가운 공기, 들리는 소리들... 모든 ‘처음’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저 연신 삐삐 울려대는 소리는 뭘까. 저 사람들은 누구지? 아니, 나는 애초에 저것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아, 귀가 울려.
   
   천장에서부터 뻗어 나온 커다란 기계만 가만 바라보다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눈을 감고 편해지려던 찰나였다. 얼굴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인가? 누군지 모를 이가 뻣뻣한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의 메마른 시선이 자신을 훑는다. 어쩐지 불쾌하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만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시선을 돌리니 그의 양쪽으로 다른 이들이 갈라지듯 서 있었다. 딱딱한 자세를 한, 딱딱한 이들. 그들은 전부 자신과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쾌함이 한층 더 밀려오는 것 같다.
   
   “이번 인공생명유기체는 성공한 것 같군. 능력이 뭐라고?”
   
   “중력 조정입니다.”
   
   “그래, 적격 판정이 뜨긴 했지만 자세한 테스트를 통해 이상이 없는지 정밀하게 검사하도록. 검사가 완료되면 훈련 후 인력이 필요한 쪽에 배치하면 되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 뒤,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이 다음 그 연구자가 했던 한마디 말만은 또렷이 생각해낼 수 있었다. 이후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몇 번이고 들었기에, 무의식중에 철저하게 각인된 그 말. 
   
   그 사람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그리고 입을 연다.
   
   “M-019816. 탄생을 축하하네. 우리에게서 탄생한 이상 자네의 몸도, 마음도, 그 능력과 의지마저 모두 우리 국가의 것이야.”
   
   “그러니 언제나 명령을 우선시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는 자가 아닌, 명령을 수행하는 자다. 나라를 위한 무기로써 충성하도록.”

*

   “...셸. 미셸.”
   
   미셸은 어렴풋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임시로 마련한 건물 내부는 새벽처럼 깜깜했으나, 곧 형광등이 차례로 켜지며 빛을 밝혔다. 환한 빛에 미간이 절로 찌푸라든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의식이 부상하자 몸은 가뿐히 튀어 올랐다. 소리의 근원을 찾자 어렵지 않게 눈앞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감독님.”
   
   “깼나. 이걸로 요기하도록.”
   
   건네준 에너지 바를 받았으나 일단 먹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엔 개인 침구 안에서 아직 몸을 뒤척이며 잠에서 깨지 않은 이들이 보였다. 벽에 걸려 있는 디지털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늦게 깬 건 아닌 모양이군요.”
   
   “그래, 오히려 이른 쪽이지. 안 좋은 꿈을 꾸는 모양이라, 잠을 설치게 둘 순 없어서 깨웠다.”
   
   아. 그제서야 미셸은 자신이 꾼 꿈을 기억해낸다. 자신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꿈.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그것도 벌써 4년은 흐른 일인가. 괜한 걱정을 끼쳤나 싶어 뒷목을 긁을 즈음 목소리가 이어졌다. 
   
   “... 혹시 피곤하면 조금뿐일 테지만 더 눈을 붙여도 좋아.”
   
   출발까진 2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물론 잔다면 더 잘 수 있는 시간이겠지만...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기엔 중요한 날이라 잠이 싹 달아났네요. ...감독님은?”
   
   “보다시피. 잠이 잘 안 와서 말야.”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그리 말하는 이의 눈 밑엔 옅은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표정만큼은 굳건하기 짝이 없지만, 다크서클 따위는 숨길래야 숨겨질 수 없는 것이었니까. 물론 자신처럼 빤히 들여다보는 사람 정도만 깨닫겠지만 말이다. 미셸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 이런 날이니 무리도 아닙니다만. 평소 컨디션 관리를 잘하라고 말씀하시는 건 항상 감독님 아닙니까.”
   
   “그건... 면목없군.”
   
   날이 날인만큼, 평소라면 두세마디 정도는 더 붙일 잔소리도 더 이상 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과 아닌 사과를 받은 걸로 만족하기로 하며, 붉은색 리본으로 양쪽 머리카락을 꽉 조여 맸다. 미셸 머레이는 군에서 행실을 바로 하라는 경고를 들었어도 머리를 양 갈래로 묶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곤 했는데, 이는 군에서 그녀가 듣지 않은 하나뿐인 명령이었다. ...아, 지금은 두 개인가. 
   
   “휴, 역시 이래야 좀 안정감이 든다니까.”
   
   양갈래를 묶은 뒤 나오는 것은 입꼬리를 올려 짓는 의식적인 미소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그 표정은 평소처럼 밝다. 좋아, 오늘도 이상 무. 바나나 너트 바 –참고로 익숙하게 열량을 농축시킨 것 같은 맛이었다-를 대강 삼키고 군복을 제 몸에 맞춰 조정하고 있자 슬슬 하나둘씩 깨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출발해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옴다.”
   
   “그래, 다른 이들도 준비시키도록 하지. 프로키온.”
   
   그녀는 미셸을 공적인 자리에선 코드네임으로, 사적인 자리에선 진짜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지금처럼 그녀를 ‘프로키온’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단 것은 이제부터 군인으로서 주어진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사적인 일보다 우선시하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미셸은 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독님.”
   
   그래, 이제부터 둘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 군인이다. 그것도 나라의 시설을 부수러 가는 혁명군.

*

   아르키움 이능력 현상 부설 연구소. 표면적으로는 이능력이 생긴 원인 및 제어 방법, 효율적인 출력법 등 이능력에 관한 모든 현상을 분석하며 연구하는 기관. 두 사람을 포함한 십여 명의 혁명군은 지금 여기로 향하고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실 이곳은 나라의 썩어버린 중심부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장소였으니까. 
   
   이능력자를 대상으로 자행되는 비윤리적 시험, 더 ‘괴물’ 에 가까운 존재를 만드는 연구, 그리 만든 이들을 통제하며 세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든 자료가 슈퍼컴퓨터에 모여 있는 곳, 그곳이 이 연구소다. 비록 직접적 인체 실험을 행하는 실험장은 따로 있다지만, 이곳에 있는 자료를 먼저 파괴하지 않으면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어 이 말도 안 되는 실험 행위를 이어나가겠지.
   
   게다가 이곳을 먼저 쳐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모든 이능력자들이 한데 모여 다니는 혁명군과는 달리, 정부군은 각 장소에 안 그래도 수가 적은 이능력자들을 나눠서 배치해야 한다. 이를 잘 이용하면, 정부군과의 수적 열세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정부군이 핵심 인력을 배치한 곳은 정부 부처와 실험장.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 그 장소들엔 많은 인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능력자를 관계된 장소에 할당하다 보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크래들 소속 특수 부대원은 많아 봤자 2~3명이고 운이 좋다면 아예 없을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공개된 장소에 있는 기관인 만큼 필요 이상으로 인력을 배치할 수도 없으니.
   
   오늘 이후 ‘빌런’들이 국가의 준엄한 연구 시설을 파괴했다는 속보가 방방곡곡으로 퍼지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고 있자 어느덧 무중력 같은 상태로 허공에 떠 있던 발이 다시 땅에 닿는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와는 확연히 있던 장소가 달라진 것이 눈에 띄었다. 인근에 사람들이 없는 건물 주변과는 달리 이곳은 새벽에도 이따금 자동차가 보이는 도시였다. 주상복합 빌딩의 한쪽에 숨어 골목 너머를 쳐다보자, 시선의 끝에서 우뚝 선 빌딩이 보인다. 거대한 컨테이너 같은 형태를 갖춘 구조물에선 촘촘히 난 창문 사이로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빛이 밝게 켜져 있었다. 틀림없는 연구소였다.
   
   미셸은 품에서 빛을 잃은 마석을 꺼내더니 그대로 밟아서 파괴했다. 산산조각난 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인도를 뒹굴었다. 1회용이라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잠시. 
   
   이 세계에서 이능력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마석이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량의 이능력을 모아 돌에 압축시킨 마석은 비능력자라도 1회성으로 이능력을 쓸 수 있게 해줄 만큼 편리했다. 비록 그 사용 방법이 굉장히 제한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몇몇 이능력 마석은 정부군이나 혁명군의 필요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순간이동 마석. 지금처럼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전부 온 건가.”
   
   알렉시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미셸은 손가락으로 다른 이들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지막이었으니, 비전투 상주 인원 2명을 뺀 다른 이들은 전부 있어야 할 것이다. 열여섯, 열일곱, ... 자신까지 포함해서 열여덟. 숫자는 딱 맞았다. 지금처럼 모두가 긴장된 상태에서 착오가 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옅은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전부 있습니다.”
   
   “그래...”
   
   알렉시아는 시선 끝마다 우리를 한 사람씩 전부 담으려는 듯 훑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침묵했다. 그 묵직한 시선을 접한 이들 중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모든 이들의 중앙에 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군들. 우리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가.”
   
   “국가는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 그들은 국민을 보호해주기는커녕, 게티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며 사람들을 통제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그 과정에서 누가 죽든 그들은 상관치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는지, 그 과정에서 국민뿐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있는 모든 생명의 권리를 짓밟았는지.”
   
   “그러한 인권 탄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것이 여기 있는 이 연구소다. 정부가 머리고, 실험실이 몸통이라면 이곳은 그 근간인 뿌리일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 뿌리를 전복시키러 간다.”
   
   “나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해. 너희의 힘을 빌려줘. 이곳을 파괴하자. 그리고, 탐욕적인 이들의 놀음에 사람들이 더 이상 짓밟히게 두지 말자.”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레지스탕스의 모두가 쳐다보고 있다. 미셸이 합류하기도 전부터, 감독님과 줄곧 함께 해왔던 이들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 
   
   그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아직 해 뜨기엔 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등 뒤로 빛이 떠오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할 정도의 이가.
   
   형용하지 못할 감정이 솟구쳤다.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나만의’ 감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다를 두 손안에 담을 수 없듯이, 한 사람만이 쥐기엔 당신은 너무 대단한 사람이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미셸은 복잡한 속내를 숨기고 빙긋 웃었다. 떠드는 말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독님~ 연설 완전 멋졌슴다! 정말 반해버릴 정도임다!”
   
   “과장이군. 애초에 연설이라 할 정도도 아니었어. 그냥 다들 너무 긴장하고 있기에 몇 마디 한 것뿐이야.”
   
   “감독님은 너무 자기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자각이 부족한 거 아님까? 정말 감독님한테 홀딱 빠져버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헉, 웬 놈팡이 같은 놈이 감독님을 채가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갖은 오두방정은 다 떨며 얘기하자, 그녀는 미셸을 쳐다보다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너무 오버했나. 이다음 말은 대충 예상이 갔다. 
   
   “프로키온. 긴장이 풀린 건 좋지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너무 경거망동해도 좋지 않아.”
   
   아무래도 우려스럽게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하긴,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계속 가벼운 태도인 것은 미덥지 않게 보일 수 있겠다. 미셸은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진지하게 대답해볼까 마음먹으며 옅은 미소 정도로 표정을 바꿨다.
   
   “걱정 마십쇼. 이래 봬도 긴장이라면 충분히 하고 있슴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번 임무는 완수시킬 테니까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감독님의 표정은 한층 더 미묘해지는 것 아닌가. 나름 이번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잘못한 건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즈음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 낮고 엄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목소리.
   
   “...프로키온.”
   
   “네?”
   
   “죽는단 각오로 임했을 때, 그것이 되려 너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살아. 살아서 끝까지 결착을 지을 생각을 해라. 죽는다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 그런 거였나.
   
   시선과 시선이 부딪혔다. 하얀 눈동자 속에 들어있는 감정을 모를 정도로 미셸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 그건 제가 여기서 죽어선 안 되는 중요한 인력이기 때문입니까?”
   
   제가 생각해도 미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에 고개를 기울일 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것도 있지만...”
   
   “...괜찮슴다.”
   
   “응?”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됨다.”
   
   “갑자기 왜...”
   
   미셸은 빠르게 상관의 입을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다음 말을 들으면 정말 견디지 못할지도 몰라. 비이성적인 생각이 튀어나온다. 걱정과 염려스러움이 담긴 시선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 안에 잠겨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살라는 말.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할 말이 미셸에게만큼은 낯설고 기묘했다. 그건 자신이 흔히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는, 목적 없이 탄생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체가 아니기에 그리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크래들 특수부대원. 국가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유기생명체. 시스템을 존속시키겠다는 목적하에 창조된 것은 인간보다는 도구에 가깝다. 그러나 미셸은 저를 만든 그 목적조차 벗어던지고 혁명군에 뛰쳐 들어갔다.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을 위해서. 당신이 그를 바라니까,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러니 당신이 저를 승리를 위한 도구처럼 다루어도 전혀 이의는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쓰라고 태어난 것이니, 제가 선택한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조차 기꺼울 텐데. 
   
   그런데 당신이 시선이 파도처럼 자신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그 이상을 바라게 될 것 같아서.
   
   문득 미셸은 인생이 바꾸게 된 ‘그날’을 떠올렸다. 갑자기 빌런 집단 –즉, 레지스탕스 혁명군-에 가담하게 된 알렉시아와 그런 당신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찾아간 자신. 모든 것이 희뿌옇던 환각 속에서,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던 체온과 그때 들은 말.
   

   “미셸 머레이. 너는 국가의 도구가 아니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지을 수 있는 자다. ...그러니 나를 따라와 주지 않겠나.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가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그런 식으로 계속 자신을 인간처럼 대해주니, 자꾸 스스로를 인간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 아닌가.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는 것 아닌가.
   
   바랄 대로 바라면 되지 않느냐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리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셸에겐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 몰아닥치는 감정을 온전히 인정하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명령을 내려줄 사람 없이도 스스로 계속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만약에...”
   
   시선은 애꿎은 아스팔트에 박혔다. 선명한 도료를 씌운 아스팔트는 빌딩의 그림자에 가려져 유독 검고 검었다. 입에서 흐르는 것은 그에 못지않게 비겁함으로 찬 말이다. 
   
   “제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요? 그래야만 우리의 일을 완수할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셸이 아는 감독님은 사적인 친분보다 공적 책임감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다. 1명의 친구를 포기하더라도 100명의 사람을 살리려는 이다. 그런 이가 쉽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우선시하라.’라고 말할 리는 없었다. 우리의 성패가 곧 시민의 안녕을 좌지우지함을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그녀는, 조금 전까지 자신더러 살라고 말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 것이다. 
   
   어떻게든 그 입으로 자기 삶보다 우선시 되는 목적이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그건 모르는 일이지.”
   
   들려오는 대답에 천천히 숨을 멈춘다.
   
   “만일 그렇다면 그때 가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자네는 현 정부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야.”
   
   이내 멈춘 숨은 허탈한 웃음과 비슷한 소리가 되어 공기 중으로 부유한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 그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 판단을 미뤄두겠다고. 실로 당신다웠다. 결국 최대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셈이구나, 당신은. 
   
   결국 항상 나는 당신에게 진다. 몰려오는 파도를 한 인간이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죽을 생각 말고 살아서 싸울 생각에 전념해라. ...미셸.”
   
   역시 걱정을 끼친 게 틀림없는 모양이다. 저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 손등 위로도 구릿빛 피부의 온기가 닿고 있었다. 자신은 괜찮다느니, 걱정하지 말라느니, 미셸은 그런 말 대신 그저 옅은 미소를 그려냈다. 
   
   “... 알겠습니다, 렉스.”
   
   입을 옆으로 벌리며 공기가 터지는 소리를 냈다가, 다시 입술을 모아서 내는 발음. 그 두 단어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이 이토록 벅차오를 수 있었다니. 미셸은 작전에 들어가기 전 짧은 시간 동안 이를 알려준 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감독관, 알렉시아 레드클리프, 혹은 렉스를.

*

   이번 작전의 핵심은 간단하다. 우선 미셸을 포함한 일행이 먼저 연구소에서 소란을 피우며 적들을 유도하고, 그사이 생긴 틈으로 다른 일행들이 2층 컴퓨터실에 침입해 기밀을 빼낸 이후 연구 자료 및 슈퍼컴퓨터를 완전히 파괴한다. 이른바 양동작전. 얼핏 보기엔 안 그래도 적은 인원이 갈라지는 거라 위험해 보일 수 있었으나, 이능력자 한 명의 전투 능력은 일반 군인 몇십 명 정도는 가뿐히 선회한다. 그리고 이 부설 연구소엔 많은 이능력자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전력 파악은 불가능한 만큼 한 번에 몰려갔다간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른다. 따라서 이 양동작전이 제일 효과적이라는 판단하에, 혁명군은 선발대와 후발대로 흩어졌다.
   
   미셸은 연구소의 옆 벽면에 몸을 숨겼다. 심심한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순찰원은, 곧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태연히 등을 돌렸다. 훈련된 번견은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가 목덜미를 내리치자, 그는 지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거.. 거기 누구- 억...”
   
   반대편에서 이 상황에 소리를 지르려던 순찰원 역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뒤에 서 있는 것은 총 (참고로, 발사된 것은 총탄이 아닌 기절용 전기다)을 든 알렉시아였다. 
   
   “다른 쪽도 정리 완료됐다는군.”
   
   그 말대로, 곳곳에서 처리를 마친 부대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셸은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연구소 정문을 바라봤다. 단단하고 육중한 문은 웬만한 이능력으론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방탄 기능이 훌륭한 금속을 활용했고, 잠금장치는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지문 및 ID카드 인식까지 몇 겹으로 걸려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도 못 뚫는다면 혁명군 체면이 말이 아니지.
   
   “전원. 작전은 잊지 마시고, 무슨 일 있으면 무전기로 연락하십쇼.”
   
   “열 수 있겠나? 공격계 능력으론 최대 출력이어도 무리일듯한데.”
   
   “괜히 당신이 절 데려온 게 아니란 걸 보여드리겠슴다.”
   
   후발대를 향해 말하며 미셸은 씩 웃었다. 말 그대로, 이 문은 물이든 불이든 얼음이든 뭐든 최대 출력을 쏟아부어도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여는 방법에 굳이 부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중력에 의해 발생하는 또 다른 힘은 인력(引力)과 척력(斥力). 만물을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을, 양쪽 문 각각에 따로따로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끼기긱-. 문이 강제로 비틀리며 금속성이 마찰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안쪽으로 밀려나는 문과 바깥으로 당겨지는 문 사이의 틈이 계속해서 벌어지다, 결국 무거운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온 연구실이 떠나가도록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48시간 정도 못 잔 연구원의 잠조차 깨울 것 같은 요란한 경고음이었지만, 혁명군 중 아무도 그에 동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애초에 왜 후문이나 다른 통로를 찾을 생각조차 안 하고 눈에 띄게 정문으로 들어왔겠는가? 양동작전을 하는 이는 눈에 띄는 것이 오히려 좋다. 
   
   “자, 화려하게 입장해보실까요~.”
   
   “그래, 가도록 하지.”
   
   미셸과 알렉시아를 포함한 선발대 전원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란스러운 군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미셸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꽤나 살벌함다~. 어휴, 무서워서 살겠나.”
   
   “방심하지 마라. 아무리 일반인이라 한들, 상대는 정예 훈련을 받은 훈련군이다. 어떤 수를 준비하고 있을지 몰라. 게다가...”
   
   “네에네에, 알고 있어요.”
   
   알렉시아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미셸은 적들의 손에 든 총을 보았다. 역시나, 
   ‘마탄’이다. 
   
   아르키움의 현 정부는 비능력자도 후천적으로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지 꾸준한 연구를 거듭했다. 비록, 인공유기생명체가 아닌 비능력자의 몸에 이능력을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한 가지 성과는 있었다. 그건 바로 이능력자의 능력이 담긴 마석을 활용하는 것.
   
   마탄은 마치 작은 대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총탄 대신 마석을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전기, 열, 바람, 빛 등의 능력을 담은 마석을 넣는다면 특수하게 제조된 마탄은 그를 이능력의 형태로 변화해 사출해줄 것이다. 비록 진짜 이능력자에 비해 그 위력과 응용력은 현저히 떨어져, 탄환처럼 이능력을 발사하는 방식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십 명이 저런 것을 들고 있다면 위험한 것은 틀림없었다. 
   
   다만 저 마탄은 기술적 한계와 자원의 문제로 한 대를 만드는 것에도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해야 할 텐데... 
   
   “참, 나라에 돈이 썩어 넘치나 보네요. 사람마다 한 명씩 저런 걸 챙겨준 걸 보면.”
   
   “... 동감이다.”
   
   “저렇게 투자해주겠다니 두세 개 정도는 훔쳐 나왔어야 하는데 말임다. 감독님처럼.”
   
   “내 것을 챙긴 거라 해주겠나.”
   
   그래, 아까 알렉시아가 순찰원을 기절시키기 위해 쏜 전기는 어디서 나왔겠는가? 알렉시아의 손에도 저들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마탄이 들려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위험한 게릴라전에 참전할 때, 미셸은 안심시켜주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몇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이들이 선발대를 둘러쌌다. 미셸을 포함한 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경계를 끌어 올렸고, 그 순간.
   
   “사격 개시.”
   
   저쪽에서 누군가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쩌적이며 갈라지고, 적의 총구에서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연기가 일제히 사출되더니 커다란 얼음으로 변모했다. 몇 미터에 육박하는 얼음들은 무서운 속도로 미셸과 그 일행들 쪽으로 날라왔다. 
   
   그러나 미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는 목표를 조준하듯 정확히 응시할 뿐.
   
   이변은 직후 일어났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던 얼음송곳들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튼다. 무언가에 잡힌 듯 갑자기 90도 직각으로 꺾인 송곳은 콘크리트 천장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일행을 조준했던 군인 세 명의 몸이 위로 붕 떠올랐다.
   
   “... 어?”
   
   그 소리를 단말마로 남기고, 그들은 벽에 말 그대로 처박혔다. 마치 광풍에 휘말리기라고 한 것처럼 초고속으로 밀려난 몸은 벽에 부딪힌 충격을 상쇄하지 못하고 걸레짝처럼 쓰러졌다.
   
   “이걸로 3명...”
   
   그러나 기뻐하긴 일렀다. 미셸은 고개를 휙 돌렸다. 문제는 이들이 아니었다. 아까 사격을 명령한 사람은 분명 이들의 머리. 그리고 그 머리란 분명히... 
   
   거대한 바위가 폭발하는 소리가 지척에서 귀를 울렸다. 미셸이 그쪽을 돌아보자, 보이는 것은 교전. 말 그대로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레이저와 같은 빛이 동료들에게 난무했고,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바위 같은 방어벽을 세우며 그를 막아냈다. 움푹 파인 바위의 한쪽 틈으로 채찍 같은 짙은 녹빛의 넝쿨이 수십 가닥씩 뻗어나갔다. 그 넝쿨은 방금 빛을 쏜 이를 사방에서 움켜쥐려 그 마수를 뻗쳤으나, 그 또한 쇄도하는 빛의 칼날에 파훼 되고 만다. 
   
   아주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승패가 결정되는 능력자들끼리의 치열한 공방이었다. 그러나, 미셸도 다른 이도 마냥 그 승부를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
   
   힘겨루기의 현장에 열을 담은 붉은 직선 하나가 끼어들었다. 닿는 사람마저 녹여버릴 것 같은 섭씨 몇백 도의 마그마를 쏜 사람은, 마탄을 든 알렉시아다. 
   
   “엄호하겠다.”
   
   적은 머리를 노리고 정확히 날아오는 공격을 목을 기울이는 것으로 회피한다. 그는 알렉시아를 노리고 주변에 빛무리들을 생성하지만, 그것이 광선으로 변환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알렉시아의 마탄은 노림수. 단지 아주 약간 적의 시선을 비트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제게 맡겨주십쇼!”
   
   덜컹. 가해진 인력을 이기지 못하고 문이 강제로 출입구에서 당겨지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료실, 이라는 간판에 바닥으로 뚝 떨어지고, 방해물이 없어지자 방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이 인력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책, 화분, 정수기부터 시작해 책장과 떨어져 나간 문짝까지 순식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 밖으로 쓸려 나왔다.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을 전환하는 것만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물질은 미셸의 무기였다.
   
   밀려 나온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위협적인 속력으로 적을 요격했다. 정수기는 목표를 향해 달려들다 레이저에 구멍이 난 채로 바닥을 뒹굴고, 책장은 벽에 쿵쿵 부딪히며 굉음을 낸다. 화분은 제멋대로 궤도를 바꿔가며 천장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져버린다. 흙이 솟구쳐 시야를 방해하고, 자신을 담아줄 곳을 잃은 산세베리아는 그대로 흰 복도에 추락했다. 그러나 깨진 도자기 파편만큼은 여전히 공중에 둥실거리며 적들을 향해 그 방향을 바꾼 차였다. 
   
   그리고- 
   
   “꼼짝 마라!”
   
   “거기 누구냐! 순순히 투항하도록!”

   
   조금 전의 소란으로 인해, 2층에 있는 적까지 보통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힘을 주어야 했다. 나이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후발대를 위한 양동작전이니까. 물론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아주 좋겠지만, 본 목적은 유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됐다. 
   
   계단을 통해 이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적의 군세를 힐끗 확인하곤, 그녀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는 군인 무리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척력으로 한쪽 줄을 완전히 밀어버리자, 꼭 파도가 양 갈래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겹겹이 밀려나 벽에 부딪히며 포위 사이에 구멍이 만들어졌다. 미셸 일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이로 뛰어든다. 이제부터 할 일은 2층의 인력까지 전부 1층 깊숙한 곳으로 유인해내는 것. 비워진 2층을 이쪽의 후발대가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적이 이렇게 많이 와서야. 슬슬 튀어야 할 시간이네요~”
   
   자, 술래잡기 시간이다.

*

   “누, 눈이! 안 보입니다! 크윽...!!”
   
   “잠깐... 거기 있었군!”
   
   “아니야! 난 아군이라고! 이봐!”
   
   환상계 이능력으로 적들이 시야의 혼란스러움을 호소하는 사이, 미셸은 다른 이능력자를 도와 중간중간 공중에 띄워진 도자기 조각을 던지며 공격을 방해했다. 그 사이 대원들은 한 치도 쉬지 않고 지면을 박차며 뜀박질한다.
   
   지금 미셸과 그 일행들은 평균적인 사람보다 1.5~2배 정도 가속한 상태로, 이는 미셸이 그들의 발바닥과 몸에 중력이 작용하는 정도를 바꿈으로써 가능했다. 사실 더 빠르게도 할 수 있지만... 아예 시야 속에서 놓쳐버린다면 양동 작전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놓칠 줄... 알고!”
   
   우와, 정말 싸구려 악당같은 대사네. 그거. 그러나 어휘의 저렴함과는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발포한 마탄의 바람은 제법 정확하게 미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저 몸을 트는 것만으론 피할 수 없는 넓은 범위의 바람 칼날에 미셸은 자신에게 붙는 중력의 방향을 반전시켰다. 호리호리한 인영이 순식간에 뒤집혀 벽에 달라붙었다가, 천장까지 도약한다. 맹렬히 그녀를 추격하던 바람의 칼날은 붉은 리본의 끝자락만을 약간 잘라낸 채로 애꿎은 벽에 흠을 내었다. 
   
   “핫.”
   
   흠잡을 곳 없는 착지와 백자 조각들이 마탄을 쏘던 이들의 손을 꿰뚫은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미셸과 다른 이들은 이동 방향을 유도하고 하면서도 적의 전력을 확실히 줄여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루트였지만... 행운이 오래 지속되진 못한다고 했던가.
   
   “전원! 침착해라. 일부는 2층을 지키도록!”
   
   적군의 목소리에 미셸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충분히 혼란을 유도했다고 생각했는데, 평화밖에 없던 연구소에 저렇게 침착한 지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있을 줄이야. 
   
   그 지시에 따라 일부는 이미 우리에게서 등을 돌려 2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일원의 곤란한 시선에 미셸과 알렉시아는 시선을 마주치더니 끄덕였다. 아마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멈춰봤자 2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추격하기엔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적의 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양동작전이라고 시인하는 꼴임다. 어차피 돌아가는 인원은 소수에 불과해요. 이능력자를 포함한 많은 인력은 저희를 추격해 잡기 위해 계속 이곳에 잔존할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가속해서 저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 프로키온과 내가 저들을 막겠다. 남은 인원은 작전을 차질 없이 수행하도록.”
   
   주거니 받거니 한 말에 남은 인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투를 빈다는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 미셸은 알렉시아의 손을 잡고는,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그 상태로 등을 돌려 가속. 지금까지 달리던 방향과 완전히 역전된 방향으로 천장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도 좀만 참으십쇼!”
   
   “내 걱정은 마라.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아.”
   
   몇 발 정도 두 사람을 향해 빛의 광선이 닥쳐왔으나, 미셸이 가벼운 발놀림으로 그를 회피하자, 어느 순간 광선은 궤도를 바꿔 다른 쪽 부대원들을 향했다. 아마 그쪽에 있는 사람들이 시선을 끌어준 것이겠지. 이 정도로 잘해주고 있다면 이제 신경 쓸 거리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중력의 방향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사뿐히 내려온 곳은 복도, 2층으로 돌아가려던 이들의 앞이었다. 
   
   “우리 앞에서 도망치려고요? 죽기 전까지 그건 허락해줄 수 없슴다!”
   
   “순순히 투항하는 걸 권유한다. ...그래 보일 것 같진 않다만.”
   
   시야 앞에 불쑥 튀어나온 적군의 모습에, 이들은 일제히 두 사람에게 마탄을 겨눈다. 공기가 자연히 팽팽해지고, 적 측은 경계를 십 분도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퍽. 중력으로 떠오른 소화기가 호선을 그리며 대립하는 이들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새하얀 연기가 솟구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다. 안개처럼 짙은 연기가 시야를 매우며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인식을 방해했다. 이런 상태에선 오히려 적이 많은 이가 유리했다. 
   
   미셸은 연기를 꿰뚫고 적진 사이로 뛰쳐들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연기 틈에서 그녀는 보이는 적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를 날렸다. 연기 속을 종횡무진 오가며, 최소한의 깔끔한 선로로 적을 후려친다는 간단한 행동원리에 기척을 알아챈 이들이 미셸 쪽을 습격했다. 
   
   그러나, 감속을 받아 속도가 느려진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이루어지는 것은 중력의 방향성을 미묘하게 바꿔가며 공격을 어긋나게 하는 일. 비틀어진 공격을 맞는 것은 미셸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있는 적군이었다. 공격을 맞은 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적인 줄 알고 반격하고, 그 반격을 받은 이는 또 공격한다. 그 사이 미셸이 해야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일뿐이었다. 직진과 회피, 쳐내고, 파고들고, 뛰며 걷어낸다. 이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적들이 때리고 있는 것은 미셸이 아닌 같은 편이다. 눈앞에 있는 이가 아군인지 적인지 모르고 치고받는 수라도.
   
   그 틈에서 어떤 이의 옆구리를 걷어차 바닥에 처박은 순간,
   
   “...!!”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커다란 얼음의 창이 미셸에게 엄습했다. 빛을 푸르게 반사하는 세빙(細氷)을, 미셸은 공중에 떠오르는 것으로 간신히 피했다. 어쩐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고는 창을 날린 이를 쳐다본다. 일반 군인 사이에 섞여든 이에게선 일반인과는 미세하게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틀림없다.
   
   “그래, 비상 인력이 없을 리가 없지...”
   
   이 연구소에 배치된 특수부대원은 빛 능력자 하나뿐이 아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숨겨둔 히든카드. 이능력자는 한 명 더 있었다.
   
   “감독님. 능력자를 제외한 이들을 부탁해도 되겠슴까.”
   
   “...그래. 저 쪽은 부탁하지.”
   
   이능력자를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이능력자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미셸은 알렉시아의 주변에 미약한 힘을 불어넣었다. 척력의 이능. 그것이 반구 형태로 렉스 주변을 완전히 에워싸도록 조작한다. 이로써 자연히 렉스의 주변에 오는 모든 공격은 반대로 밀려나며 반사될 것이다. 그리고 방어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순수한 사격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알렉시아는 이 분야의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잔챙이들의 처리 정도는 몇 명, 몇십 명이 있어도 그녀에게 어렵지 않겠지.
   
   “괜찮겠는가.”
   
   다만, 복잡한 수식 활용이 필요한 척력은 한 명에게 적용하는 것이 한계였다. 이 능력을 쓰게 된다면, 미셸 본인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반사하거나 꺾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감독님이 저렇게 물어오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겠지.
   
   “굳이 이 능력이 아니더라도, 제겐 상대를 굴복시킬 방법이 101가지 정도 있슴다. 걱정하지 마시죠.”
   
   “... 알겠다. 조심해라.”
   
   장난스러운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이능력자를 찾던 미셸은 문득 바닥의 이상을 감지했다. 복도는 어느새 하얗게 물들어 푸른 빛을 난반사하고 있었다. 이건 빙판이다. 미끄러움에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선 정신을 차려야 할 정도의.
   
   발밑이 어색해진 미셸과는 다르게, 주변에선 빙판을 자유롭게 활주하며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최고속으로 달리는 이는 이미 이러한 지형이 익숙한 듯,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미셸의 주변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이런.”
   
   감속을 사용해도 원체 빠른 탓에 효과가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섣불리 가속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몸의 균형을 무너트릴 위험이 있었다. 이제껏 하던 것 같은 속도전은 무리였다. 미셸은 작게 혀를 차며 총구를 조정했다. 
   
   탕, 탕! 그러나 일반적인 산탄총은 결코 적을 맞추지 못하고 차례로 빗겨나갔다. 발포 소리가 몇 번이고 귓전을 울려도, 빠르게 움직이며 시선을 교란하는 대상은 순순히 잡혀주지 않아 지형지물만이 총탄에 부서질 뿐이었다. 
   
   “...”
   
   자신을 뒤쫒고, 앞지르며, 무슨 짓을 해도 맞지 않는 대상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미셸의 발밑에서 얼음의 꽃이 활짝 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부 측의 인원이 조작이라도 한 것인지, 연구실의 천장 중 일부가 걷혀 사라졌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2층이 아니었다. 숨겨진 공간에 존재하던 자동소총들이 미셸과 알렉시아만을 정확히 겨냥했다. 
   
   “이 연구소, 무슨 구조가... ”
   
   무슨 구조가 이래. 빌어먹을. 이래선 연구소보다 공습에 대비한 전투 시설 같지 않은가.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지면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기계음과 함께 무수한 탄환이 미셸이 있는 쪽으로 쏟아졌다.
   
   다리 한쪽을 붙잡으며 서서히 신체를 동결시키듯 올라오는 푸른 성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빙판 위, 엄습하는 총탄들. 미셸이 이러한 판단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위로 올라가서 공중전을...!
   
   뻔하디뻔한 전략. 평소라면 조금 더 머리를 굴렸을 터지만, 급격하게 다리를 치고 올라오는 빙결 때문에 벌어진 판단 미스였다. 
   
   중력으로 인해 공중에 붕 뜨는 상태, 상대는 잠시간 무방비해지는 그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한 개의 크기가 책장 한 채에 육박하는 거대한 고드름 6채가 생성되더니, 상하좌우에서 틈이 생긴 미셸을 습격했다. 
   
   “---크윽!”
   
   순식간에 이쪽으로 연구실의 서랍을 치솟게 해 극사의 빙결에 꼬챙이처럼 꿰어지는 결말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충격까지는 상쇄하지 못했는지, 서랍을 꿰뚫으며 돌진하는 고드름의 기세에 미셸은 그 충격을 공중에서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날아갔다. 
   
   쿵! 벽에 격돌한 그녀의 어깨는 비명을 지르고 등뼈가 삐걱댔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무릎부터 쓰러지려던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연구소가 이런 특수한 구조를 감추고 있을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게다가 순식간에 지형을 빙판으로 바꿔 속도의 유불리를 없애고,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까지 예상하고 대응책을 세워두기까지 하다니... ...
   
   “하, 이 연구소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거지...”
   
   어떻게 저 적을 상대해야 좋지, 어떻게 해야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까. 머리가 제발 굴러가기를 사정하는 심정과는 다르게 통증으로 아찔해진 머리는 한층 더 둔해져 갔다. 게다가 항상 알렉시아가 있는 영역의 척력을 계산하며 전투에 임해야 하니 상황은 더 안 좋았다. 말하자면, 머리 한구석으로는 항상 다른 생각을 하며 상대와 싸워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프로키온!”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저쪽을!”
   
   순간 자신의 쪽을 쳐다보며 외치는 알렉시아를 향해 미셸은 단호히 일축했다. 괜찮다. 어차피 알렉시아가 없었다면 마탄을 든 적을 1명도 아니고 수십 명까지 자신이 상대해야 했을 터. 이쪽이 더 번거로우면 번거로웠지, 더 편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도망칠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이 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단 말이죠...”
   
   지금 내뺀다면 틀림없이 2층엔 능력자들이 들이닥칠 테고, 컴퓨터에서 정부 관저 정보를 빼낼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지. 혁명군으로선 지금이 국가의 기밀에 손을 댈 수 있는 가장 큰 찬스였고, 커다란 기회이기도 했다. 미셸 개인 때문에 이 작전을 망칠 수는 없었다.
   
   미셸은 한쪽 발끝을 웅크리며 폭발력을 모았다가,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가 발차기를 적에게 때려 넣었다. 
   
   “...!”
   
   상대는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그를 피하지만 무언가에 놀란 듯 눈이 크게 벌어진다. 그래, 가속한 속도와 흔들리지 않는 균형이다. 
   
   미셸의 발은 얼음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붕 떠 있었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공중에 뜨느라 틈이 생길 일도 없이, 빙판의 미끄러움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가속할 수 있었다. 
   
   피한 상대와 시선을 교차하고, 재차 공격을 날린 것은 미셸이다. 얼음이 생성되기도 전, 가속한 주먹은 상대의 안면을 뭉개버릴 듯 맹렬하게 다가온다. 얼핏 보면 평범한 주먹질 같으나, 이는 중력의 무게를 몇 배로 곱해 무겁게 만든 폭력. 가속으로 인한 피해까지 더하면 주먹과 발길질 하나하나의 위력은 거대한 쇠공에 직격으로 맞는 것에 필적하여, 섣불리 팔로 막으려 했다간 팔뼈가 전부 부러질 것이다.
   
   상대는 얇은 얼음막을 형성해 불규칙한 궤도로 날아오는 공격을 간신히 막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날아오는 미셸의 다리를 피한다. 붕- 마치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는 것 같이 묵직한 바람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접근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그는 몸을 숙이더니 얼음길을 미끄러지며 뒤로 순식간에 물러났다. 
   
   “... 여전히 빠르네.”
   
   아쉬움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상대를 보면, 거대한 얼음 원반이 공기를 뒤흔들며 미셸 쪽으로 날아온다. 공중에 떠 있는 미셸은 여러 각도로 날아오는 거대한 원반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건가. 그렇다면 그 기대를 부숴주겠다.
   
   원반을 피해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쪽에서도 아래로부터 박차고 올라오는 원반이 있다. 본래라면 이는 결코 피하지 못할 방향. 하지만 마치 무언가에 의해 날아가기로 한 듯, 본래라면 인간이 움직일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궤도로 미셸의 신체가 튀었다. 중력을 이용한 것이다. 날아오는 빙판은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인영을 맞추지 못한 채로 전부 부서지거나 연구소 벽에 박혀버렸다. 
   
   그리고 상대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물체’가 많을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이쪽이란 점이지.
   
   미셸은 이를 친절히 알려주는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벽에 박혀 고요하던 얼음 가시와 원반들은 다시금 뽑혀 나가더니, 제 주인을 향해 이를 드러낸다. 사방에서 쇄도하며 미셸을 위협하던 빙결들은 이제 공기를 찢어발기며 상대를 꿰뚫기 위해 날아갔다. 
   
   “... ...”
   
   그러나 상대는 고요하다, 어째서지? 
   
   다음 순간에서야 미셸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얼음은 상대의 앞에 닿자마자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거울 조각이 산란하듯 깨져버린다. 
   
   “상쇄 능력이라고... ...?”
   
   그런 효과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었다. 당황을 추스르기도 전, 깨져버린 빙결의 틈으로 허연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세빙이 흐드러지고 빛의 난반사가 난무하는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이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증기와도 비슷한 얼음 안개.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두터운 연기가 시선을 메운다. 미셸은 침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전과 같은, 1 대 다수의 일반인 전투에선 시선을 방해받는 편이 자신에게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이런 능력자들의 전투에선 그렇지 않다. 곳곳에서 들리는 마탄 소리, 이능력이 사출되며 벽에 처박히고 폭발음을 일으키는 소리 때문에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얼음 안개는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완벽히 숨겨주었을 것이고, 게다가 노린 것인지 눈에 띄는 색조차 없어서 안개에 완벽하게 녹아내린 그는... ... ... 잠깐만. 색?
   
   붉은 리본. 양동작전을 위해 일부러 눈에 띄는 색을 골라온 것이 오히려 패착이었다. 미셸은 다급히 리본을 풀어냈으나, 이는 한발 늦은 처사였다. 
   
   자욱한 안개를 뚫으며 돌진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미셸과 충돌하며 무시무시한 충격을 남긴다. 대지에 튕겨지며 작은 인영이 날아간다. 
   
   “쿠...쿨럭....”
   
   몇 번이고 빙판길 위에 튕기며 날아가는 탓에, 왼쪽 늑골이 부러지고 저릿한 충격이 척수를 타고 올라와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직접적으로 찌르는 듯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가운 가운데, 토혈의 작열감만이 목을 화끈하게 태웠다. 
   
   미셸은 부들거리는 팔을 채찍질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미처 일어서기도 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얼음칼이다. 간신히 그를 회피해도, 즉시 빈틈을 노린 발차기가 미셸에게 엄습했다.
   
   “큭, 으윽....”
   
   뼈가 부서지는 충격이 뇌를 강타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는 그냥 발차기가 아니었다. 닿은 심장부가 서서히 새하얗게 얼어붙어 가는 느낌에 몸은 미셸에게 경고를 보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꾹 조이며 놔주지 않는 기분. 심장을 건드리는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그는 지금껏 웬만한 통증을 이겨내도록 훈련받은, 크래들 정예부대조차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미셸의 집중력이 일순 모두 흐트러진 것은. 
   
   “... 잠깐, 안....!”
   
   머릿속으로 일순 계속 기동 중이던 척력의 계산식이 끊겼다.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자신과 함께 계속 싸워주던 알렉시아 또한, 무방비 상태로 적에게 노출된 것은. 
   
   얼음 검날이 허공을 가른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다. 
   
   서걱-. 적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옆에 있는 기둥을 잘라냈다. 그리고 그것이 받치고 있었던 것은 렉스가 위치하던 곳의 천장. 순식간에 지지대를 잃은 천장이 무너져내리고, 가속 같은 것은 할 수 없는 일반인이 그를 피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미셸은 직감한다. 무얼 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굉음이 났다.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천장이 가라앉고, 매캐한 연기가 흩날렸다. 기둥 하나가 무너졌는데도 연구소는 건재했다. 보통의 빌딩 같으면 천장 전체가 무너지거나 2층의 지반이 흘러내릴 텐데. 무너진 천장 위에선 또 숨겨져 있었던 자동 저격 소총이 보일 뿐이었다. 역시, 이 연구소는 보통의 부설 연구소가 아니라 전투 요새 같았다. 이를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자신의 패착이다. 
   
   연기가 걷히고 나면, 부서진 잔해들만이 무겁게 그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쓰러진 기둥이 최종적으로 위를 짓눌러, 잔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됐을지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감독님? ... 감독님! 렉스!”
   
   그러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중력을 한 곳으로 응축시켜 무거운 기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잔해까지 들어 올리려 한 바로 그때...
   
   조금 전까지 미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얼음의 창이 꽂혔다. 아니, 이젠 얼음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마탄의 총구가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중력을 이용해 높이 도약하자, 조금 전까지 있던 자리에 전기가, 바람이, 광선이 날아온다. 
   
   미셸은 그 순간 확신했다. 이놈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알렉시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어째서? 나만 노리면 됐잖아. 초조함과 절망감에 그런 생각이 휘몰아쳤으나, 사실 그들이 알렉시아를 노린 이유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부도 미셸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능력자는 감독관이 없으면 100% 자멸하므로, 빌런을 상대할 땐 감독관도 함께 사살하라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감독관까지 없는 나 하나쯤 상대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겠지. 놈은 그런 생각까지 더해 알렉시아를 먼저 노린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의 판단으로, 계산으로, 무감정으로.
   
   “너희는...”
   
   어금니가 으득, 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갈렸다. 부러질 듯이 세게 문다. 
   
   “나를 자아도, 의지도 없는 도구로 만든 걸로도 모자라서,”
   
   눈앞이 붉게 튄다. 움직임을 방해하던 심장의 통증은 단기적인 것이었는지 얼음이 녹아내리며 잦아들었다. 부러진 늑골과 어깨는 여전히 둔통을 호소했지만 지금의 미셸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조차 전부 빼앗으려는 거냐!!!!!!!!!!!”
   
   연구소를 뒤덮을만한 격노가 번개처럼 내리친다. 주변 공기가 격렬한 살의에 터질 듯 팽창하는 것과 동시에, 푸른 인영은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그녀를 노린 정예 부대가 다시 한번, 마탄을 발포한다. 그러나 미셸의 주변에는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작렬하는 열 광선은 미셸에게 닿기 전 그대로 튕겨 나와, 방금 전 그를 발포했던 사람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녀에게 향하는 공격은 모두 척력의 반사에 의해 튕기고, 그녀를 공격한 정부군들은 그대로 전신이 불타 연소해버린다. 
   
   다시, 연구소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동소총이 그녀를 요격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총알 또한 모두 반사될 뿐. 거리낄 것이 없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능력자에게 돌진했다. 
   
   무게를 몇 배로 실은 산탄총을 휘두르고, 그 뒤에 생긴 틈에 적을 향해 무릎을 차올린다. 그 하나하나는 몸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회피하던 적은 미셸 쪽을 향해 거대한 얼음 쐐기가 솟구치게 했다. 부서지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과 충분한 위력을 지닌 일격이었다. 그러나, 
   
   “... 윽!”
   
   그조차 일정 범위 이상 접근하자, 척력에 의해 으드득- 소리를 내며 꺾여나간다. 
   
   미셸의 시야가 다시 한번 새빨갛게 물들고, 머리가 강한 두통과 함께 경고를 보냈다. 폭주의 전조였다. 거대한 힘까지 억지로 꺾어버릴 정도로 이능력을 썼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능력을 시전하는 방식은 사용자의 뇌에 큰 과부하를 걸어서, 갈수록 이지를 잃고 멋대로 날뛰다 폭주하게 만든다. 따라서 평소에도 미셸은 이런 방식으로 능력을 활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었다. 그래, 평소에는 말이다.
   
   시선이 다시 부딪힌다. 아까 전, 전의로 빛났던 새파란 눈은 이제 그를 넘어선 살의가 번져 있었다. 능력이 통하지 않아 틈이 생긴 상대에게 가까이 접근해 멱살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높이까지 날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모든 지형지물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던 서랍, 구멍이 뚫린 책장, 의자와 책, 깨진 화분 조각들이 공중을 활보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적의 멱살을 놓고 내동댕이쳤다. 바동거리던 적은 순식간에 자유로워졌음에 당황했으나, 그다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면으로의 자유 낙하였다. 그와 동시에 공중을 유영하던 모든 물체가 그녀를 요격한다. 수많은 지형지물의 습격은 마치 ‘쏟아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적은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얼음으로 된 칼을 생성해 책장을 가르고 화분 조각을 쳐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꺼운 빙산이 미셸의 주위를 에워싸며 솟구쳐 올랐다. 얼음벽이 순식간에 천장까지 맞닿으며 작은 감옥에 그녀를 가둔다.
   
   과연,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가두겠다 이건가.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까지 머리를 굴린 것은 칭찬해줄 만하다. 중력 조정이라는 능력의 특성은 지형지물이 없는 좁은 공간에 있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어떤 물건도 없고 빠져나갈 길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 또한 ‘능력을 무리하게 이용하지 않는다’ 는 전제에 한정한 이야기.
   
   이제 것까지와는 달리, 광범위하게 지면 전체를 대상으로 중력을 조작한다. 대지가 뒤흔들리며 마치 드릴로 땅을 파내는 듯한 진동이 연구소 바닥을 뒤흔들었다. 물론 미셸이라도 이 연구소 전체를 들어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그럴 생각도 아니었다. 그러나.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벽에 틈이 벌어지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얼음이 깨진 것은 순식간이다. 
   
   “...어떻게... ...”
   
   추락의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지 못한 채, 몸을 가다듬던 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일 중력에 의해 아파트가 뽑혀 나간다면, 아니, 최소한 가로수가 뽑혀 나간다면 주변의 공기는 멀쩡하겠는가? 대지는? 중력의 힘이란 본디 중력이 발휘되는 물체 주변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발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응용하면 이렇게, 물체 없이도 중력만으로 순수한 파괴의 힘을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능력자는 심상찮은 공기의 파동을 피해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더는 다가오는 미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살의로 가득한 인영이 재차 짓쳐 들자, 그는 당황한 듯 몇 채의 고드름을 생성해 그녀에게 날렸다. 
   
   미셸은 이번엔 척력보다 더 유용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중력을 이용해 기절한 정부군 중 한 명을 이쪽으로 잡아끌었다. 간단히 그 어깨를 잡는 것만으로도, 미셸에겐 아무런 피해 없이 군인의 어깨에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박혔다. 만일 심장에 박혔다면 그는 즉사했겠지만 그녀는 그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 아무리 정부군이라도 자신의 인력을 줄이는 일은 꺼린단 사실이 중요했다.
   
   다시, 강한 중력이 다른 정부군의 몸조차 공중에 띄운다. ‘무리하지 않는’ 범주에선 2~3명 정도가 띄우는 것의 한계. 그러나 그녀는 대부분의 군인을 한 번에 들어 올렸다. 
   
   “... 죽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적이 날아가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튕겨나간 몸이 시멘트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머리를 세게 부딪힌 이들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아래로 추락... 하진 않았다. 다시금 무중력 상태로 떠오른 이들은 이능력자를 향해 마치 물건처럼 던져졌다. 이거라면 그 이능력자도 함부로 잘라버리지 못하겠지.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망설임은 패배를 낳지.
   
   정의의 히어로보다는 악당 같은 방식이지만 어떤가. 먼저 자신의 소중한 이를 건드린 것은 저들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도주의를 고집하며 자신을 말려줄 이 또한... 없다. 이왕 빌런으로 불리는 김에 철두철미한 빌런이 되어주마.
   
   방패막이로 쓸 사람의 멱을 잡고 질질 끌고 오는 이는 인간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크래들 소속의,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전투 병기. 인공생명유기체 M-019816. 머리의 고통은 한층 심해졌지만, 몸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 더욱, 더욱, 실컷 날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조차도 잊은 채로. 시퍼런 안광은 오롯한 적의 섬멸만을 맹목적으로 쫒는다. 
   
   “... ...”
   
   불리한 형국에 처한 적은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앞길에 빙판을 깔아 활주하듯 미끄러지며 달렸다. 그 뒤로 미셸은 아주 약간만 공중에 떠올라, 자신에게 가속도를 불어넣고 적에겐 감속을 가했다. 
   
   쿵, 쿠웅-! 미셸의 뒤를 따르는 것은 연구소 내의 온갖 물체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연구소 뒤편의 문이 열리고 각종 가구가 튀어나와 그 물건의 수는 갈수록 세를 불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미셸의 앞으로 튀어나와 도망치는 이를 조준한다. 웬만한 이라면 결코 뒤에서 습격하는 물체들을 피하지 못할 텐데, 역시 에이스는 에이스인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물체를 회피했다.
   
   이번엔 이능력자 앞의 문이 갑작스럽게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의 머리에 부딪히려는 문을 간신히 피해내고, 앞을 가로막는 소파를 일도양단한다. 장애물들이 계속해 방해하는 와중에도 쫓고 쫓기는 레이스는 쉽게 거리가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온갖 물체를 이능력자에게 떄려박는 미셸과는 달리, 그는 물체를 피해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추격의 기미는 쉽게 누그러들지 않아, 부상당한 몸은 지쳐가지만 중압감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그 초조함. 그 초조함 때문에 하나의 빈틈만 보이면 됐다. 그리고... ...
   
   “읏...!”
   
   이능력자는 활주를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연구소를 몇 바퀴나 돌면서 이곳의 지형을 익힌 미셸이, 일부러 타이밍을 노렸다가 이곳에 몰아넣은 것이다. 
   
   마침내 퇴로가 막힌 적의 등 뒤로는 미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십을 넘어 수백 가지로 불어난 지형지물의 떼들이 그를 덮친다. 
   
   “... ...!”
   
   칼로 베어 넘기는 것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베어 넘겨야 할 대상이 수백 개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적은 연구실의 책상과 함께 벽에 강충돌하며, 다른 물체들의 잇따른 충돌을 이기지 못한 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물체가 전부 떨어져 나가자, 축 늘어져 움직임을 멈춘 이능력자의 몸만이 주룩 벽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죽어버려.”
   
   미셸은 그 위에 올라타, 꽉 쥔 자신의 총구를 그를 향해 휘둘렀다. 퍼억-. 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아, 한 번으론 안 죽는 건가...”
   
   하지만 짐승과 같은 그녀의 감이 말해준다. 이제 이 일격을 단 한 번 심장에 박아넣기만 한다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미셸은 아까보다도 더한 무게를 실은 총구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꼭 철구로 내리찍는 것과 같은 이 위력을 피할 방법은 적에게 더 이상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나 불쾌함은 눈에서 초점을 잃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무리한 능력 사용을 견디지 못한 뇌는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명령만을 내리고 있었다. 죽인다 죽인다 죽여버린다.
   
   확실한 사형선고. 그를 집행하기 위해 팔을 내리치려 한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들었다.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평소의 미셸이라면 제 손목에 닿자마자 그를 뿌리치고 반격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
   
   “멈춰라, 프로키온.”
   
   지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미셸은 의심과 함께 뒤를 돌아본다. 영원 같았던 1초 뒤에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크게 벌어진다. 그녀가 있었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가 있었다.
   
   “어... ... 떻게?”
   
   환각의 이능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제 같다. 맞닿은 살결의 생생함이, 부드러운 온도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반증하고 있었다. 미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간절한 눈동자로 알렉시아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이했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서 내보이는 것은, 빛을 잃은 마석. 여기에 올 때도 사용했던, 순간이동용 마석이다.
   
   “하나 더 챙겨두고 있었어.”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떨리는 목소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 채, 입을 열어 더듬더듬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리본조차 없는 자신에게 더는 평온을 가장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 리본이 있다고 해도... 분명 안 됐겠지. 
   
   “당신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편으론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불안감을 버릴 수 없어서, 보통 저런 천장에 깔리면 압사하니까, 그러니까... ...”
   
   알렉시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뻗는다. 손목을 붙잡지 않은 쪽 손이 미셸의 결 좋은 머리카락 위로 올라갔다. 따뜻하다. 사람의 온도였다. 당신의 온도였다. 
   
   “이능력자들의 싸움에 위험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이런 것도 대비해두지 못할 사람으로 보였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꼭 울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렉시아가 물은 것에 대한 답은 들려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렉시아 레드클리프는 어떤 상황에서든 미셸 머리이에게 기적을 보여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있기엔 지금까지 허무하게 잃어온 인명의 숫자가 너무 커서, 그녀는 절망했다. 이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을 전부 죽일 생각뿐이었다. 설사 동귀어진하더라도. 다시금 시선이 쓰러진 이능력자를 향한다.
   
   “저, 아직 많이 화났습니다. 감히 당신을 건드리려 했으니... 저 치들을 찢어발겨 죽인다 해도 성에 안 찰 거예요.”
   
   다시금 미셸은 알렉시아를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부드럽고 강건한 시선은 그녀를 그대로 받아주며,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그건 안 된다고. 재차 그리 말하듯이.
   
   당신의 그 명령에 굳이 따를 필요는 없었다. 예전에 당신의 말에 따랐던 것은 정부에게서 ‘자신의 감독에게 충성하라.’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정부군 소속이 아니다. 멈추라 해서 멈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 그렇지만 당신이 그리 명령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불복하겠습니까.”
   
   당신은 나의 감독이므로. 
   
   총을 치켜든 팔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처음 만났을 때, 멈추라는 당신의 한마디에 최후의 일격을 포기한 것처럼. 천천히 총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툭, 하고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고맙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던 미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 살아있으니 살린 겁니다.”
   
   “알고 있다.”
   
   “당신이 죽었으면, 결코 그들을 살려둘 생각 따위 없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죠.”
   
   “그 또한 알고 있어.”
   
   “당신이 없는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죽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쉽게 죽어줄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어.”
   
   몇 번이고 협박한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괴물을 잡는 괴물이 되어버릴 거라고. 분명 무너져버려서 자멸할 때까지 정부군을 죽여버릴 거라고. 어린애가 떼쓰는 것처럼, 당신이 아닌 자신을 걸고, 당신이 없으면 무너질 존재를 계속해 각인시키려 했다. 그것이 당신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방법 외에 당신을 붙잡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해서. 
   
   그러나 알렉시아는 끝에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약속했지 않은가. 계속 네 옆에 있겠다고.”
   
   “... ... ... 약속, 어기면 안 됩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그녀는 여전히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옅은 웃음을 남겼다. 그때, 두 사람의 무전기가 울린다. 2층의 정보 처리를 완료했다는 것. 곧, 기절한 이를 빼내고 연구소를 폭발시킬 준비를 하겠다는 이야기. 그 무전을 받은 알렉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소란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겠군. 가자, 프로키온. 일어설 수 있겠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이동하도록 하지.”
   
   그리 말하며 알렉시아가 2층으로 이동하려던 때였다.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맞닿는 체온이 느껴졌다. 주인이 누구인진 말할 필요도 없었다. 
   
   “... 감독님.”
   
   “왜 그러지?”
   
   미셸은 그녀의 등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제서야 부상의 아픔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고 이마를 넓고 따뜻한 등에 기대자,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차가운 시체의 감촉이 아니라, 지금 여기 생생히 존재하고 있는 삶의 온도가.
   
   자신이 언제부터 이 온도가 없으면 안 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 분노가 낯설다. 이 절박함이 낯설다. 당신이 없으면, 살아가는 것조차 두렵게 된 자신이 낯설다. 두려운 것은 나 자신의 판단이 당신의 생사를 결정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무기에게 자아 따위는 존재해선 안 된다. 단지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할 뿐, 필요한 판단은 전투적 판단 능력 외엔 없어야 한다. 나머지 감정은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며 몇 번이나 교육받았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감정을 가지게 된 인공유기생명체는 고장 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런데, 당신만은 정반대를 말했다. 
   
   “... 감독님은 제게 명령하셨지만, 인간으로 사는 일은 너무 험난합니다.”
   
   그러나 태어나길 도구로 태어난 이에게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감정도, 자신이 이런 감정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는 사실도. 
   
   “어떤 감정을 느껴도 낯설어요. 그게 전부 저의 감정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도, 그 결정에 책임지는 것도, 전부 어렵습니다. ...거대한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라면 아시겠습니까.”
   
   당신을 이렇게 애정하다가도 문득 겁이 난다. 이러다 당신이 문득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절망스러운 고뇌의 끝에선 결국 이런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다.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런 불안과 슬픔을 직면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미셸.”
   
   “네?”
   
   “나는, 그대에게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살라 명하지 않았어.”
   
   생경한 말에 미셸은 눈을 깜빡인다. 하지만 이전, 분명히... ... 
   
   족적을 되짚어가면 떠오르는 사실이 있다. 인간으로 살아달라고 했지. 그리고 같이 살아가자고 했다. 그를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명령이 아닌 말 같은 건, 처리할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인간이 되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까지처럼 도구로써 지내도 그것이 그대의 의사라면, 존중해야겠지. 단지, 내가 그런 취급이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
   
   그렇다면 나는 되돌아가고 싶은 건가? 미셸은 한 차례 자신에게 질문을 저었다가, 부정의 답을 내놓는다. 예전 같은 삶으로 회귀는 사양한다. 행복에 겨워 웃다가, 거대한 불안에 휩쓸리기도 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왜냐하면,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단순한 도구로는 당신과 나란히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도구인 나조차 거두어주겠지. 그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래선, 옆에서 나란히 시선을 맞추고 같은 길을 걸어나갈 수 없다. 아마 영원히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반복되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당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동등해지고 싶어서.
   
   험난한 길이라도, 너덜너덜해지고 상처 입더라도, 계속 인간의 길을 걷는 것. 그는 누구의 명령도 아닌 오롯한 미셸 머레이의 소망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인가. 그렇다면 낯설 수밖에 없어. 허나, 낯선 채로 영원히 지속되진 않아. 살아있고, 영향을 받고, 감정을 느낀다면, 얼마든지 바뀌어 나갈 수 있어. 그 낯선 감각과 기분이야말로 그대가 인간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익숙해질 수 있을까. 이 모든, 소용돌이치는 격렬한 감정에 무력하게 휩쓸리지 않는 때가 찾아올까.
   
   알렉시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 위로 미적지근한 온도가 재차 겹쳤다. 그녀는 미셸의 손등을 덮듯 손을 포갠다.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표정을 숨기기 급급했던 미셸은 순간 숨소리가 멈췄다. 그렇게, 어떤 순간이든 옆에 있어 줄 것처럼 굴 때가 제일 곤란하다. 이 온도가 얼마나 사람을 안심시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그것이 당연한 권리이다. 그대 또한 그 권리를 쥘 자격은 충분해.”
   
   존중, 가치, 권리. 그리고 자격이 충분하단 말. 전부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단어들을 당신은 당연하게도 말한다. 
   
   "어렵다면 내가 하나씩 알려주마. 네 페이스에 맞춰 나아가면 돼. 혼자 해결하는 일이 아니라, 같이 알아가보자. 그런 식으로 생각해봐 줄 순 없나."
   
   어딘가의 책에서 읽은 말을 기억해낸다. 소금기가 도는 바닷물은 서서히 칼날을 녹슬게 만든다고 하던가. 그렇게 녹슨 칼날은 무기로서는 제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 의한 것이라면, 그건 참 기꺼운 고장이었다. 
   
   미셸은 천천히 입을 연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표정으로. 이것만큼은 렉스에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말은 비겁합니다. 어디까지 저를 기대하게 만들 셈인가요. 정말, 어디까지고... ... 기대해서, 평생 당신을 옭아맬지도 몰라요.”
   
   아까 전까지의 절망감이 무색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능의 부작용도 점점 가라앉고, 시야는 점점 다채롭게 선명해지는데 눈에는 당신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낮보다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의 모습밖에는. 
   
   “싫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너무, 좋아요. 조금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새삼스럽게 느낀다. 자신은 이 사람에 의해 천국도, 지옥도, 전부 오갈 수 있다고. 인간도 무기도 될 수 있다고. 당신만 옆에 있어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셸은 그녀에게 얼굴을 완전히 붙인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신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
   
   그리고 그때- 다시 한번, 미셸과 알렉시아의 무전이 울렸다. 무슨 일 있냐고, 빨리 오라는 신호. 미셸은 결국 그에 픽 웃으며 알렉시아에게서 떨어진다.
   
   “정말 분위기 파악 못하는 무전이네요.”
   
   “어쩔 수 없지. 일이니까. 그리고 분위기가 중요한가?”
   
   “그냥 농담임다. 농담! 그치만 이럴 땐 좀 맞춰주십쇼~”
   
   붉은 리본을 주워든 채 순식간에 머리를 묶은 미셸은 평소처럼 씩 웃는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연구소에서 다시 탈출해 대기한 차량이 있는 장소까지 내달릴 때였다. 
   
   미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휘영청 달이 떠올라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크게 보이는 달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단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폭탄이 기동하기 시작한 연구소는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의 잔해가 터지고 불타오른다. 그러나 그 위에 떠오른 달은 어떤 소란도 비명도 없이 고요하게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투명한 달빛이 도망치는 레지스탕스 일원들에게 산산히 닿아 부서지고, 미셸은 그 광경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옆에 있는 알렉시아가 “왜 그러지?” 하고 물을 때까지. 그녀는 “그냥... ” 하고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한다.

   “달이 아름다워서요.”
   
   그 말을 들은 알렉시아 역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폭발음과 사이렌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푸르고 시린 달을 눈에 담던 그녀는 납득한 듯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군.”


※글의 일부 내용은 @Hora_Taro 님의 페어 AU 타로 플롯을 참고했습니다. 

bottom of page